지난 15일 여의도의 한 강당에서 열린 ‘피임제 재분류(안) 공청회장 모습.

지난 6월 15일, 여의도의 한 강당에서는 ‘피임제 재분류(안)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다. 일반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식약청 안이 공개된 후  열린 첫 공청회로, 강당의 열기는 뜨거웠다. 행사가 시작되기 한시간전부터 산부인과의사회, 약사회, 종교계, 여성계 등이 단체로 참석하여 피켓과 전단지로 단체의 입장을 알리고 있었다. 취재열기도 달아올랐다. 피켓을 든 사람들을 사진 찍는가하면 토론자들의 인터뷰를 따느라 분주했다. 식약청의 발제와 12명의 토론자들의 발제가 이어지는 동안 객석의 반응은  끓어올랐다. 청중토론 시간에는 서로 발언권을 잡으려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취재진들은 발 빠르게 내용을 타전하며 실시간 뉴스를 쏟아냈다.

이날 공청회의 열기가 보여주듯, 피임약 재분류 문제는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안이다. 의사회는 일반피임약과 응급피임약이 모두 전문약으로 분류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종교계는 응급피임약이 전문약으로 분류돼야 함을 적극 주장했다. 약사회와 여성계는 일반피임약과 응급피임약 모두 일반약으로 분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찬성과 반대로 나뉜 두 진영 내부에서도 찬성과 반대의 이유는 각기 달랐다. 의료계는 부작용의 문제를, 종교계는 생명권의 문제를 주장했으며, 약사회는 비용과 접근성을, 여성계는 여성의 선택권을 주장했다. 피임약의 분류는 의약품에 대한 전문성과 이해관계는 물론이고 성과 생식에 대한 사회적 가치가 응축된 문제로, 입장차이가 분명하다. 무한대립의 국면으로 치달을 위험이 보이는 상황에서 언론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여론의 중재를 통해 첨예한 입장 차이를 합리적으로 수렴시켜야 할 언론이 고작 각 진영의 찬반구도를 중계방송 하듯 보도하거나, 충분한 토론 없이 급하게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내보낼 뿐,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피임약 정책이 여성의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의사와 약사간의 ‘밥그릇 싸움’ 쯤으로 몰아가거나, 종교계와 여성계가 낙태를 둘러싸고 벌이는 해묵은 대립의 재판(再版) 정도로 이해하려는 안이한 태도도 보인다. 평행선을 달리는 구도에서 합리적인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몇 가지 전제를 확인하고, 접점을 좁혀 고찰해 나가고자 한다. 


첫째, 용어 정의가 필요하다. 사전 피임약과 사후 피임약이라는 용어를 쓰며, 마치 투약시기에 따라 선택 가능한 대등한 약제인양 오인하도록 유도하는 용어의 사용에 반대한다. 당연히 '일반피임약'과 '응급피임약'으로 불러야 한다.

둘째, 수정란부터 생명이기 때문에 착상을 방지하는 응급피임약 사용을 반대한다는 종교계의 근본주의적 주장은 논외로 한다. 발생의 어느 단계에서부터 독자적인 생명으로 볼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이미 착상방지를 통해 피임작용을 하는 자궁내장치가 사회적 동의를 얻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응급피임약의 작용기전에는 착상방지 뿐만 아니라, 배란의 억제와 정자의 이동방해 등도 있음이 감안돼야 한다. 따라서 응급피임약을 낙태와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는 종교계의 일방적인 주장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셋째,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이 ‘성의 문란’을 가중시키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금욕주의적 주장도 논외로 한다. 현재 혼인 연령의 상승과 비혼 인구의 증가, 청소년의 성적 개방 등으로 혼인의 여부나 출산의 목적과 관련 없이 이뤄지는 성관계는 갈수록 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사회적 성의식도 매우 다양하다. 한편에선 여전히 혼전순결을 문제 삼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성인은 물론이고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상호동의만 있으면 어떠한 성관계도 도덕적인 문제가 없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란한 성’의 도덕적 기준은 정의될 수 없다.

넷째, 올바른 피임의 보급은 ‘문란한 성관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피임 없는 성관계’를 줄인다. ‘피임 없는 성관계’는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로 이어져 정의조차 애매한 ‘문란한 성관계’ 보다 더 큰 도덕적 문제를 유발한다. 피임의 보급은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유발하는 ‘무피임 성관계’를 줄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권장될 사항이다. ‘문란한 성관계’를 줄이는 것은 성과 윤리에 대한 포괄적인 교육을 통해 접근할 사안이지, 피임의 보급을 저해하여 임신의 공포를 통해 달성할 사안이 아니다.

다섯째, 피임정책을 출산율과 연동시켜 사고하는 것에 반대한다. 피임은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 낙태율을 낮추는 것이지 출산율을 낮추는 게 아니다. 무피임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때 출산보다 낙태를 선택하기 쉽기 때문이다.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도록 만드는 범사회적인 노력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원하는 임신으로 바꿔내는 총체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여섯째, “의사, 약사 다 못 믿겠다, 모두 일반약으로 전환하라, 여성들이 알아서 먹겠다”며 소비자의 선택권을 강조하는 여성계의 주장은 언뜻 의사, 약사에 휘둘리지 않고 여성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주장처럼 들리지만, 실은 피임약정책이 의사와 약사간의 밥그릇싸움이라는 잘못된 프레임에 말려들어, 여성이 권리의 주체로서 무엇을 주장해야 할지를 망실한 빈곤한 주장이다. 이는 마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논의에서, 주권의 주체로서 안전한 밥상을 요구하고 미래세대의 건강을 책임지려는 노력 없이, 소비자 선택권을 최우선가치로 내세워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해롭든 말든 소비자가 알아서 먹을 테니, 무차별적으로 개방하라고 주장하던 시장주의자들의 입장과 무엇이 다른가.

이상의 잘못된 논의가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며, 사회구성원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전제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전하고 확실한 피임법을 보급해 낙태 등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

둘째, 여성은 자신의 성관계, 임신, 출산 등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줘야 한다.

셋째, 사생활의 보호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전제로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응급피임약은 안전하고 확실한 피임법이 아니며, 낙태를 줄이지 못한다. 응급피임약은 고농도 호르몬제로 구토, 질 출혈 등 부작용이 있으며, 반복 사용했을 경우 장기적인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직 임상경험이 축적되지 않았다. 피임성공률도 49~80% 정도로 낮으며, 질출혈이 있은 후 뒤늦게 임신임이 발견돼 낙태로 이어진다. 2001년 스웨덴에서 응급피임약을 일반약으로 전환한 뒤 판매량은 2배로 증가했지만, 낙태는 오히려 20%가 증가했음에 유의해야 한다.  

둘째, 응급피임약은 성폭행이나 기타 불가피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용법이 제한돼야 하며, 일반피임약이나 콘돔 등 사전피임법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응급피임약이 전문의약품임에도 불구하고 사용률이 5.6%에 이르며, 최근 4년간 71%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현재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일반피임약의 사용률이 2.5%에 불과하며, 갈수록 판매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미 응급피임약이 통상적인 피임법으로 오남용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현재 식약청의 개정안대로 응급피임약이 일반약으로 전환되고, 일반피임약이 전문약으로 전환된다면, 이러한 추세는 가속될 것이며 응급피임약을 일반적인 피임법인양 오용하는 악습이 정착될 것이다.

셋째,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12시간 이내에 (늦어도 72시간이내에) 투약돼야만 효과가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거를 제시한다. 맞다. 응급피임약이 일상적인 피임약의 대체제가 아니라, 본래의 용도에 맞게 성폭행이나 이에 준하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사용돼야 할 경우, 신속하고 안전한 투약이 이뤄져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응급실이나 분만실 등 24시간 열려있는 곳에서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바로 투약하는 것이 맞다. 응급실이나 분만실의 문턱이 높다고 말해선 안 된다. 본래의 취지대로  응급피임약이 사용된다면, 응급피임약의 사용은 일생에 한두 번 정도 있을 드문 일이어야 한다. 아이가 야간에 열이 나도 응급실을 찾는 행태와 비교해보더라도 응급피임약을 투여받기 위하여 응급실에 가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아주 드물게 사용돼야 하는 응급피임약의 긴급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일상적 공간인 약국에서 사먹도록 하는 것은 응급피임약의 일상적 사용을 염두에 두었거나 이를 유도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정책은 반복사용 등의 오남용을 방지하고 구토나 질출혈, 임신 가능성 등 부작용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여성의 건강을 해치고 낙태의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따라서 응급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해 약국에서 팔 것이 아니라,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하되 의약분업 예외항목으로의 지정해 응급실과 분만실 등에서 신속하게 투약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지금도 성폭행의 경우에는 응급키트에 포함돼 있는 응급피임약의 빠른 투약이 이뤄지고 있다. 단 이러한 투약이 이뤄질 경우, 진료기록의 유출을 지금보다 더 철저히 방지하여 사생활 보호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넷째, 일반피임약의 사용을 늘려야 한다. 일반피임약은 안전성과 피임성공률이 응급피임법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며, 선진국의 사용률은 30~40%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용률은 2.5%로 터무니없이 낮다. 일반피임약이 현재 식약청의 안대로 별다른 조치 없이 전문의약품으로 전환된다면, 접근성이 낮아져 사용률이 더 낮아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접근성을 낮추지 않으려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현재 일반피임약을 약국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용률이 이처럼 낮은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물리적 접근성이 낮은 탓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섯째, 일반피임약 사용률이 낮은 이유는 일반피임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크게 작용한다. 즉 매일 호르몬제를 먹는 것이 괜찮을지 안전성이나 부작용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막연한 불안감으로 심리적 장벽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일반피임약의 장기적인 사용은 혈전증 등의 의학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외국의 보고가 있다. 흡연자나 유전적 소인이 있는 경우에는 그 위험성이 더 증가된다. 그러나 건강한 일반여성의 경우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부작용의 우려 없이 안전한 사용이 가능하며, 월경과다나 생리통 등의 경우 일반피임약의 복용으로 증상을 완화되는 치료효과를 보기도 한다. 따라서 일반피임약을 먹는 것이 안전하고 내 몸에 잘 맞는지 의학적인 확신을 줄 수 있다면, 심리적 장벽을 낮추어 일반피임약 사용이 증가될 수 있다. 즉 현재 광고를 보고 미심쩍어하면서도 혼자 약국에서 일반피임약을 사먹는 방식이 아니라, 의사와의 전문적인 상담을 통해 일반피임약을 처방받아 먹는다면 일반피임약의 사용률이 오히려 높아질 수도 있다.

여섯째, 일반피임약을 처방받으러 진료실에 들어가는 문턱이 낮아져야 한다. 꼭 산부인과가 아니라, 가정의학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등에서 피임상담과 처방이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각종 매체를 통한 홍보는 물론, 진료대기실에 피임관련 브로셔를 비치하고 다른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도 진료실에 들어와 물어보라고 커다랗게 포스터를 붙이는 등 대대적인 유인이 있어야 한다. 성인여성은 물론, 청소년의 경우에도 1차 진료를 하는 도중에  의사가 피임은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를 의례적으로 물어보게끔 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여성들의 불편함을 가급적 줄이기 위해 처방전의 6개월~1년 정도의 리필이나 장기처방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리고, 정기적인 산부인과 진료는 최소한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일곱째, 일반피임약 처방이나 이를 위한 검사, 체내 삽입형 피임장치 등 피임시술에 대한 건강보험의 적용으로 경제적 장벽이 낮아져야한다. 이를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라이프스타일에 가장 잘 맞는 피임법을 경제적인 장벽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보험 재정이 피임진료와 시술에 사용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건강보험 재정은 질병치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예방에 해당되는 피임진료에 쓰일 수 없다고 하거나, 저출산 상황을 운운하며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여성의 건강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낙태 등 사회적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당위로 의료계와 여성계가 뭉쳐 일부 종교계를 포섭하고,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여 돌파해야 할 사항이다.  

여덟째, 일반피임약을 전문약으로 전환하되, 건강보험 적용으로 경제적 장벽이 낮아지고, 가정의학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등에서 편하게 진료를 받으면서 안전하고 적합한 피임방법에 대한 충분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궁극적으로 여성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적극 홍보해야 한다. 또한 처방전을 통해 약국에서 약을 받을 경우, 공개된 약국에서 피임약을 달라고 말할 때보다 사생활의 보호도 더 잘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야 한다. 이러한 홍보를 통해 일반피임약의 사용률을 높이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아홉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위해, 일반피임약과 응급피임약을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안전성도 확보되지 않는 피임약을 알아서 사먹고, 그 비용과 부작용 등을 혼자서 감수하며, 임신의 공포와 갖가지 위험성,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의 고통 등을 혼자서 떠안는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피임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맺고 응급피임약을 먹어야하는 상황은 이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로 보아야 한다. 응급피임약의 부작용을 충분히 교육받은 여성이 무피임 상태의 성관계와 응급피임약 복용을 자발적으로 원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성관계가 남성의 주도로 일어나며, 여성의 성적 발언권이 문화적으로 억압된 상태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피임을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관계에 있어서 지금과 같은 불평등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피임 성공률이 과대 포장된 응급피임약을 아무나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면, 성적 권력을 지닌 남성은 ‘귀찮고 무드를 깨는데다 성감을 줄이는’ 콘돔의 사용을 거부하거나 등한히 하고 여성에게 응급피임약을 먹도록 종용하거나 유도할 가능성이 크다. 피임에 있어서 남성의 책임을 강화하지 못하고, 피임은 여성이 사후에 알아서 하는 것이 되며, 이후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이어졌을 경우에도 임신의 책임은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 된다. 즉 응급피임약을 제때 챙겨먹지 못한 여성의 탓이거나, 응급피임약을 먹고도 임신이 된 것은 여성의 재수 탓이 되는 것이다. 피임이니 임신이니 낙태니 하는 모든 것이 ‘성관계 이후 여성이 알아서’ 할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책임을 떠안은 여성들은 성관계 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생리주기에 관계없이 응급피임약을 강박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사먹게 되고, 응급피임약의 피임실패율 만큼 원치 않은 임신이 일어났을 경우 별다른 대책 없이 낙태로 이어지게 된다. 스웨덴의 예에서 보듯이, 응급피임약의 판매량이 늘고, 낙태도 늘어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열째,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자유롭게 피임약을 구매하거나 낙태할 수 있는 권리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으로 이해돼야 한다. 즉 여성이 원치 않은 상태의 성관계, 임신, 출산 등을 거부할 수 있고, 원하는 상태의 성관계, 임신, 출산 등을 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돼야 한다. 예컨대 여성이 안전하고 적합한 피임법을 사회적으로 제공받으면서 자신이 원할 때 성관계를 하고, 성관계에 앞서 남성에게 피임을 요구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성관계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여성들은 시장의 소비자로서 마음대로 피임약을 구입해 복용할 있는 수세적 권리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시민권의 주체로서 안전하고 질 높은 피임진료와 이를 위한 경제적 지원을 내놓으라는 공세적 요구를 해야 한다. 또한 남성들에게 피임의 책임성을 높이기 위하여, 콘돔사용을 당연시하는 문화가 파급될 수 있도록 남성들의 피임교육을 의무화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개별상황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사용을 요구하거나 무피임 상태의 성관계를 응당 거부할 수 있는 성적 협상력을 높여야한다. 아울러 연인이나 부부관계라 하더라도 여성이 거부한 성관계는 성폭행에 해당된다는 사회적 인식을 일반화시켜야한다.

열한째,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을 권리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원하는 경우 이를 실현할 권리도 동시에 주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불임치료에 대한 사회적 지원강화와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요구해야 한다. 또한 비혼모 비혼부 자녀에 대한 차별금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피임의 실패가 곧 낙태로 이어지거나 비혼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출산하고도 기를 수 없는 빈궁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지원하는 정책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높이고, 낙태를 방지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지키며,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으로, 임신·출산에 관한 사회적 논의에서 가장 강력한 합의를 가지고 추구해나갈 정책이다.

황진미는? 

이화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보건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자격도 취득했다. 2002년에는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한겨레21>, <시사저널>, <비타민> 등에 영화 관련 글을, <한겨레 훅>에 법정르뽀를 기고하고 있다. 현재 라포르시안의 '황진미의 라뽀&르뽀'란 고정코너를 통해 보건의료계, 혹은 의료시스템과 관련된 이슈를 진단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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