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희(산부인과 전문의,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모임 회원)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되어 쉽게 살 수 있는 약이 될 거라는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는 산부인과 의사인 나로서는 걱정되고 답답한 심정뿐이다. 그런데 여성계에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을 앞세워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란 무엇인가? 임신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출산을 계획하는 것을 여성의 의지로 하겠다는 뜻이다.

임신된 이후에는 엄연한 생명이며 타자인 태아가 존재하고 태아의 생명권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임신에 있어 성인남녀가 현명하고도 적절하며 책임감 있는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임신을 원하지 않는 경우 피임계획은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이며, 국가와 의료계는 국민들의 건강권과 피임권을 제대로 보장해줘야 하며 정책적으로 지원해줘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해 언제든지 손쉽게 구매해 복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는 일은 피임권을 보장하고 자기결정권을 담보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여성계'라 불리는 여성운동가들은 마치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해 사후피임약을 언제든지 편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을 피임권이나 자기결정권을 보장받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이런 주장은 무지에 의한 억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후피임약이라는 것은 효과는 장담할 수는 없는 피임방법이기는 하지만, 이미 성관계가 끝난 이후에 다른 방도가 없으니 응급처치 개념으로 복용하는 약이다. 효과가 좋아서 믿을 수 있는 피임방법이라서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이 이 약이라도 써보자 하며 복용하는 약이고, 아무 때나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주기 중 배란기간인 경우 잠자리를 하였을 때 잠자리 후 되도록 빨리 복용해야 그나마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한 한 달에 한번, 최대 두 번까지만 복용할 수 있는 약이라서 잠자리할 때마다 수시로 복용할 수도 없고 복용해서도 안 된다. 자주 복용한다고 피임효과가 비례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닌 약이다.

이런 약이 접근성만 좋아진다 한들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피임권을 보장할 것이며, 접근성이 높아진다고 여성들의 원치 않은 임신을 얼마나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쉽게 자주 복용함으로써 약의 오남용에 의한 피해사례만 높아질 뿐 피임성공률이 높지 않은 약을 복용함으로써 원치 않은 임신만 늘어날 것은 뻔한 이치다.

사후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되었을 때 과연 누가 피해를 보게 될까. 약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진 만큼 필요하지도 않는 상황에도 불안한 마음에 오남용을 하게 될 확률이 많고 이로 인해 제약회사와 약사들은 약을 더 많이 팔수 있으니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것이다.

또한 제대로 된 피임방법이 아닌 실패할 가능성이 다른 피임방법 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사후피임약에 의존함으로써 원치 않은 임신이 많아질 터이고 이런 임신은 낙태시술이든 출산이든 간에 병원을 찾는 이유가 되고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산부인과 환자도 늘어나게 될 테이니 병원을 경영하는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손해 볼 것도 없다.

소위 '여성계'라 칭하며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무지에 의한 억지주장임을 자신들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들이 주장했던 대로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되었으니 원하는 걸 얻었다며 의기양양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후피임약 복용으로 원치 않은 임신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이로 인한 낙태시술 또는 출산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대한민국 여성들이야말로 사후피임약 일반약 전환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이다. 

경구피임약(사전피임약)보다 15배나 높은 고농도의 호르몬제를 남용함으로써 생기는 질출혈, 호르몬이상, 생리불순 등의 각종 부작용 또한 대한민국 여성들의 몫이 될 것이다. 이렇듯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 전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대한민국 여성들이며, 그 여성들의 뱃속에 자라나는 태아들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일이 뻔히 발생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정책을 막아내는데 한계를 느끼는 우리 의사들 또한 전문가를 전문가로 인정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또 다른 피해자로 남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피임성공률도 그리 높지 않고 아무 때나 복용해서도 안 되고, 고용량 호르몬제라서 부작용이 심해 복용횟수를 제한하고 있는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을 단지 접근성을 높여 손쉽게 복용하게 하는 것만으로 자기결정권을 보장받겠다는 주장은 사후피임약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사후피임약은 의학적으로 그리 권할만한 피임방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반의약품 전환으로 인해 여성들이 사후피임약에 피임을 의존함으로써 원치 않는 임신이 늘어나고 그로 인한 낙태율의 증가가 과연 우리 사회에서 바람직한 현상인지 모두들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사후피임약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가에 대해 신중히 심사숙고해보고 진정 여성을 위한 피임 정책은 무엇인지 똑바로 논의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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