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고위험 산모 만날수 있어…불가항력적 의료사고 발생시 보호장치 부재

최근 잇따라 발생한 산부인과 의사들의 죽음으로 의료계가 격앙되고 있다.

특히 지난 3일 경기도 L산부인과의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여의사의 사인(死因)이 당초 알려진 것처럼 스트레스로 인한 돌연사가 아니라 자살로 밝혀지면서 의사들의 안타까움과 분노는 극에 달한 상황이다.

12일 경찰에 따르면 최근 사망한 산부인과 여의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병원 숙소에서 다량의 마취제가 나왔다고 한다.

여의사가 자살을 선택한 주 원인은 분만 의료사고를 연달아 두 번이나 겪으면서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데다 피해자 가족의 난동 등에 따른 압박감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첫 번째로 겪은 의료사고는 산모 1만명 중 1명 꼴로 일어난다는 '모성사망'이었다. 

이와 관련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오수영 교수는 “분만을 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이라면 고인이 겪었던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했으리라는 상황을 충분히 공감했을 것”이라며 "이는 러시안룰렛처럼 누구든지 고위험 산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개원가의 여의사는 의료분쟁 과정에서 물리적인 난동이 발생할 경우 저항하거나 대응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오 교수는 “여의사가 신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얼마나 대처할 수 있겠냐”며 “대학병원은 그나마 병원 조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개원가는 법적인 보호장치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4월부터 시행 예정인 의료분쟁조정법에 적어도 난동금지조항은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분만병원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의료사고 피해자 측의 난동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을 입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의료분쟁조정법 비대위 이동욱 총무는 “버스운전기사를 폭행한 사람에게 가중처벌을 적용하는 것처럼 안정적인 분만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의료분쟁 관련 난동자들에게도 가중처벌조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여의사회도 지난 12일 성명서를 내고 의료분쟁조정법 독소조항을 철회하고, 난동금지조항을 추가하라고 촉구했다. 

여의사회는 "경기도 L산부인과 원장이 의료분쟁의 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사망이라는 극단적 선택함으로서 의료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며 "특히 여자 의사는 의료사고를 당할 시 유족들의 위력과 도를 넘은 불법 행동에 아무런 사회적 보호 장치가 없이 법의 사각지대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여의사회는 "따라서 이번 의료분쟁조정법에서 의료기관 난동 등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조항을 명시해 줄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도 의료분쟁조정법 시행 반대 서명이 종료되는 대로 분쟁조정법 반대 운동을 지속할 방침이다.

산부인과학회 김암 의료분쟁조정법TFT위원장은 “현재까지 약 1,500명 이상의 반대 서명을 받았다”며 “산부인과 의사들이 자살하는 등 일련의 사건은 산부인과의 총체적인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의 분만의료 붕괴를 답습하기 전에 의료분쟁조정법 시행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산부인과 의사들의 자살 이후 의료계에서는 자발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되는 분위기다.

전남 광주의 H요양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산부인과 전문의 K씨를 돕기 위해 의사 커뮤니티 등을 통해 1,000여만원 이상의 성금이 모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사망한 L원장을 위한 모금운동도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산부인과의사회 등은 이번 주중 구체적인 모금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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