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서울 0의대 본과 4학년, 제 76회 의사국시 합격생)


저는 의대 본과 4년을 무사히 마치고 이번에 국시를 치른, 또 다행히도 의사면허를 받게 된 현재 학생과 의사 사이의 국시 응시생입니다. 실기점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성적열람을 통해 확인한 국가고시 필기점수는 440점 만점에 원점수 397.5점, 전환점수 179점입니다. 백분위 환산으로는 상위 3% 이내에 드는 성적으로 국시를 마쳤습니다. 굳이 성적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글이 턱걸이로 의사국시에 합격한 의대생의 불만 가득한 볼멘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최근 제 76회 의사국가시험(이하 국시)이 최근 합격자 발표 및 성적 발표까지 그 일정을 마쳤습니다. 실기 시험의 복원 혹은 유출문제로 시끄러웠던, 또 한편으로는 국시 기출문제를 이용한 출판사들과의 저작권 문제가 불거졌던 제 75회 국시를 뒤로 하고,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은 문제공개와 이의신청기간을 신설하였습니다. 물론 지난해에 특히 민감한 사안이었던 실기시험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그 문항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쪽짜리 기출문제 공개였지만 그동안 굳게 잠겨있어 투명성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의사국가시험의 빗장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시험이었습니다.

전국의과대학본과4학년협의회(이하 전사협)이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약 17년 전, 국시의 합격률이 터무니없이 낮아 원활한 인턴수급을 위해 국시의 재시험이 시행되었고, 이때 재시험에 합격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같은 해에 시험을 본 동기들이 시험 문제를 복원해 도움을 준 데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사협은 이후 매년 당해년도의 국시에 응시한 선배들이 후배들의 국시 대비를 위해 본인들이 치렀던 국시 문제를 복원하는 일을 주요사업으로 하며, 국시와 관련된 학생들의 문의 사항을 놓고 국시원과 대화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등 국시와 관련된 본과 4학년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기능을 하였던 단체입니다.

전사협은 문제 복원을 하다보면 복원 당사자인 학생들이 인턴 입사를 하고 병원 업무에 바빠지게 되면 복원된 문제의 정리, 인쇄, 배포와 관련하여 직접 일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출판사의 도움을 받는 쪽으로 복원사업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출판사 측과 떳떳치 못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불거졌고, 출판사와의 마찰 역시 크게 작용해 이를 맡긴 출판사가 바뀌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년까지도, 몇몇 출판사들이 국시 기출문제를 학생들로부터 받아 문제집을 출판해 이득을 챙겨오고 있었고, 3000명에 달하는 본과 4학년 학생들은 국시합격을 위한 참고서로 해당 문제집을 무비판적으로 구매하여 공부하는 일을 반복해왔습니다. 단순히 문제를 정리해서 출판하는 것이 아닌, 해당 문제에 대한 해설과 관련된 교과서 내용을 정리하여 요약집이 같이 실려 있었으나, 수록된 기출문제가 책을 구입하는 이유가 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국시원은 위와 같은 국시 문제 복원을 통한 문제집 판매에 대해 출판사가 국시원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법적인 제제를 가하려 했습니다만, 실질적인 제제가 가해졌는지 여부는 학생인 제가 접하는 소식 선에서는 없었습니다. 분명 국시원의 저작물에 해당하는 문제를 바탕으로 출판사들이 이익을 추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관련 문제집들이 사라지고 전국의 모든 의과대학 학생들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신경과, 신경외과, 응급의학과, 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영상의학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 마취통증의학과 등등의 교과서를 모두 섭렵하며 국시를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가능하다 하더라도 효율적이고 꼭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의대를 다니면서 교수님들께 자주 듣는 얘기가 있습니다. "중요하니까 족보인거다". 국시에 자주 출시된 문제는 그만큼 흔하고, 또 중요한 질병, 상황, 의료지식입니다. 그런 면에서 족보가 아예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1차 진료의사의 자격을 부여하는 국시에서는 이런 중요한 질병 위주의 지식을 묻고, 또 물을 것에 대비해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시원이 올해부터 문제를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문제를 통해서도 출판사가 또 영리를 위한 문제집 판매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문제에 대한 접근을 위해서 문제집을 의무감으로 구매하게 되는 학생들은 줄어들겠네요. 문제집의 가격 면에서도 출판사 입장에서 문제의 복원에 대한 비용을 따로 청구할 수 없게 된다면 과하게 부풀려져 있었던 국시문제집 가격이 진정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기출문제 공개를 바탕으로 출판사가 없어져도 학생들이 중요한 질병 위주로 초점을 맞춰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출판사에 대해 국시원이 소송을 진행한다 해도, 의대생들이 어쩔 수 없이 출판사를 응원하며 그 소송비용이 문제집 가격에 더해지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구매해야하는 일도 없어질 수 있지요. 물론 문제 공개 첫 해인지라 지나친 장밋빛 전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학생들을 문제집 출판사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국가고시를 치르면서 시험에 나온 문항들을 접할 때 느낌은 "정말 정성들여서 잘 만든 문제다"라는 느낌입니다. 특별히 과하게 꼬여서 어렵다거나, 너무 지나치게 지엽적인 문제들로 세심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실제 환자를 대할 때처럼, 아직 가공되지 않은 환자에 관한 정보들 하나하나를 모아서 결론을 내리고, 그에 따른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라는 인상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후배들은 문제 그 자체로 보고 공부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참 다행인 일이다 싶었습니다. 이전까지 학생들이 직접 문제를 복원해서 나와 만들어진 문제집 속의 기출문제들은 비교적 정보가 한번 정리된 것이 많았습니다.

이전까지의 시험문제에 비해서 올해 시험문제의 경향이 그렇게 바뀐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복원을 하기 위해서 문제의 복잡한 세부정보들이 복원자인 응시자의 머릿속에서 한번 사고과정을 거쳐 단순화되어 기억되었다가 기록되게 되면,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 사이에서 중요한 것들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문제집을 풀게 되는 후배들은 연습해보지 못하게 되겠지요. 오히려 문제를 공개함으로써 본과 4학년까지의 의대교육과정을 마무리하는 학생들이 국시를 연습하기 위해 기출문제를 풀어봄에 있어서 더욱 실제 임상에서의 사고과정에 가까운 연습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국시원은 이번 국시에서 문항공개와 더불어 이의신청을 받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몇몇 문제에 대한 해설과 정답사유를 공개하였습니다.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복원된 문제에서도 “논란이 되는 문제”라며 복원된 문제의 정답을 정하고, 문제 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정답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명확하지 못한 경우가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복원 자체가 비공식적이었을 뿐더러 정답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에 후배 입장에서 해당 문항의 공부를 하다 보면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가 분명 있었습니다.

이번 이의신청 기간에 총 95문항에 대한 이의제기가 있었고, 그 중 한 문제만이 복수정답으로 인정되었으며, 13문항의 경우 이의제기에 대한 답변을 국시원 측에서 문제에 대한 해설과 함께 공개했습니다. 해설을 통해 풀이된 13문항 외 나머지 문제들에 대한 검토과정 또한 공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한 것이 매우 고무적입니다.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국시원의 문제들 중에도 복수정답이 인정되었을 법한, 혹은 잘못된 답이 정답으로 나왔을 가능성이나 답이 없는 문제였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합격/불합격의 대세나 석차의 큰 변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정도였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국가에서 공인하는 의사의 면허를 부여하는 시험이 더욱 공신력이 있기 위해서는 그 선발 과정에서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이 절대 무리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공개하는 만큼 더욱 다양한 문제은행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시원은 양질의 문항개발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필기시험 문항뿐만 아니라 실기시험 역시 개선할 점이 많습니다. 제한된 시험장과 연기자의 숫자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 응시자를 상대해야 하는 표준화환자들의 반응이 얼마나 신뢰도 높게 표준화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채점 항목을 공개하지 않는 바람에 학생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나쁜 소식을 듣고 슬퍼하고 있는 환자를 위해서 휴지를 뽑아주면 점수를 줄 것인가요, 아니면 손을 잡아주면 점수를 줄 것인가요. 어떤 응시자가 손을 잡아주면 불필요한 신체접촉으로 감점을 당하고, 어떤 응시자가 손을 잡아주면 따뜻한 위로의 표현으로 채점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성 접촉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 어떤 응시자에게는 고분고분 개인 사회력을 얘기하면서, 어떤 응시자에게는 오히려 반문을 하면서 응시자의 성경험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이런 반응의 차이가 응시자의 태도나 질문의 과정이 아니라 성별이나 외모에 따라서 달랐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조심스레 해봅니다. 아마 그런 걱정을 불식시켜 줄 가장 좋은 방법은 채점 항목을 공개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응시자를 촬영한 동영상은 열람 가능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불합격자한테 만이라도 말입니다.

이번 의사국시 필기시험이 평년에 비해 난이도가 낮았다고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도 문항을 공개하기로 했기 때문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공개하기로 한 문제에서 지나치게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내용을 출제하기는 곤란할 수 있었겠죠. 실기시험의 채점기준은 얼마나 명확히 구성되어 있을 지 궁금합니다. 실기시험의 채점기준을 공개하게 된다면, 그래서 각 학생이 어느 항목을 통해서 얼마나 점수를 받아 합격했고, 누구는 그 항목에서 얼마의 점수를 받아 불합격했는지를 알려주게 된다면, 적어도 베일 속의 채점기준 보다는 명확하고, 신뢰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단 국시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문제를 출제하는 부담 때문에 많은 의과대학에서 시험 문제가 해마다 반복되어 그대로 출제되고, 이 때문에 문제를 공개하지 못하게 됩니다. 학생들은 비공식적으로 후배들을 위한 족보를 만들어 반복출제 되는 문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상황에서 언제까지 서로를 바라보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해야 할까요. 중요한 내용은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내용의 문제가 하나로만 출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를 공개하고, 정답에 대한 이의 제기를 받는 과정이 각 의과대학의 평가과정에서도 당연시되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끝낸 기 응시자에게는 시험문제의 복기를 통해 해당 지식에 대한 뚜렷한 각인의 기회를 주고, 다음 해에 시험을 볼 후배들에게는 문제로 주어진 상황에 대한 올바른 답을 제시함으로써, 학습과정에서의 혼란을 줄여줄 수 있겠지요.

투명성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압니다. 제한된 문제은행과 열악한 환경 하에서 모든 것을 다 공개하지 못하는 사정은 이해도 충분히 갑니다. 시험 문항이 늘어나고 고사장 역시 증설된다면, 그를 바탕으로 실기시험에서도 좀 더 신뢰도 높은 투명성을 기대할 수 있겠지요. 올 해 첫 필기문항 및 정답 공개와 이의신청 접수를 계기로, 국시원의 출제 및 시험 관리 업무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외부 필진의 글에 대한 다른 생각이나 의견을 보내주시면 적극 반영토록 하겠습니다(bus19@rapportian.com). 혹은 기사 본문 하단의 '독자 첨부뉴스'를 통해 반론이나 의견을 게재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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