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익(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


“대통령님, 의약품 비리가 일어나는 샘물을 말려 주십시오. 이것이 의사와 약사를 구원하는 길이고 우리 국민을 살리는 길이고, 우리나라의 보건의료를 새 출발시키는 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나라의 보건의료가 21세기를 온전히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대학교수로서 애써서 가르친 제자들이 도둑질하는 의사가 되는 것을 이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1998년 11월 참여연대의 개혁통신에 어느 의사가 올린 글(원제목은 '의약품 비리의 뿌리는 이것입니다')이 신문지면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특히 그의 글이 ‘의도(醫盜)'라는 표현과 함께 의사와 제약사간 리베이트 비리를 폭로하는 양심선언으로 비치면서 의료계 내부가 발칵 뒤집혔다. 결국 이 글은 우리 사회에 건강보험 약가의 문제점과 의료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단초가 됐다. 그로부터 1년 9개월 뒤 의약분업이 도입됐다.

당시 ‘양심선언’의 주인공이 바로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용익 교수다. 의사들 중에는 여전히 그를 향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적개심의 기저에는 동료의사를 매도하고 잘못된 의약분업을 도입했다는 비난이 똬리를 틀고 있다. 사실 2000년도 의약분업 도입 전후로 의사들은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분업 도입 전에는 제약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챙기는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됐고, 분업 도입 직전과 직후의 ‘의사 파업’ 과정에서는 환자들을 볼모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됐다. 김용익 교수는 그러한 모든 과정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의대 의생명과학관 5층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김용익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자신의 말이 활자화되면서 또 어떤 오해를 불러올까 하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가급적 충실히 반영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전체 인터뷰 분량이 길어졌다.   

 - 현 정부 들어서 보건의료 분야에도 규제 완화 정책이 다수 추진되거나 검토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진보 진영에서는 현 정부의 보건의료정책 기조를 '시장주의 의료정책'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보건의료 분야에 지금보다 국가의 개입이 더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국가의 개입이 강화돼야 할 부분과 약화돼야 할 부분이 있다. 국민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부분은 강화돼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공의료 서비스 부문이다. 아직까지 공공의료는 취약하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이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의 평생건강관리라든지 건강증진, 의료의 질관리, 지역별 병상수급, 의약품비 조절, 의약품이나 치료재료 품질 관리 등은 국가 개입이 확대돼야 할 영역이다. 의료시장의 질서와 규칙을 강화하는 것에서도 국가 개입이 강화가 돼야 한다. 자동차보험이나 산재보험, 건강보험 등에서 발생하는 과잉진료나 공급과잉 등의 문제를 조절하는 것도 당연한 국가의 의무다. 반면에 오히려 국가 개입이 약화돼야 할 것도 있다. 국가가 의사들의 의료행위에 상당히 깊이 개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진료비 청구심사와 관련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진료비 지지불제도가 행위별수가로 돼 있기 때문에 의료행위 하나하나마다 심사하고 규칙을 정해주고 하는데 이러다보면 끝이 없다. 이로 인해 의사들의 합리적 진료행위마저 저해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것은 진료비 지불제도가 포괄적으로 바뀔 때 국가 개입이 줄어들 수 있다고 본다. 의사들이 진료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행위별수가제가 조금 더 포괄적인 방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 지불제도와 관련해 포괄적 방식으로 바꾼다는 것이 결국 총액계약제 도입을 의미하는 것인데. 의료계는 총액계약제가 도입되면 오히려 정부의 통제가 심해질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총액계약제를 도입하면 병원별로, 혹은 지역별로 총액을 주든지 하고 그 범위 안에서는 의료기관이 마음대로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행위별 수가제는 굉장히 세밀한 항목별로 예산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 개입이 상당히 강할 수밖에 없다”

- 현 정부는 의료를 산업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육성하자는 취지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검토해 왔다. 예를 들면 의료관광정책이나 건강관리서비스 제도화,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결국 의료민영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의료관광산업 활성화를 통한 해외환자 유치는 의료민영화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외환자 유치는 현행 병원제도, 보험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건강관리서비스제도화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있을 것으로 본다. 서비스산업 선진화의 경우 영리병원 계획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민영화와)관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 의료민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기보다는 일종의 분위기 조성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의료의 산업화가 아니라 상업화를 촉진하는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 참여정부 초기에도 영리병원 허용 논쟁이 제기된 바 있다. 당시 실제로 참여정부 차원에서 영리병원 허용에 대한 검토가 이뤄졌나.

“물론 있었다. 그런데 정부 안에도 여러 개 부처가 있다. 그 중에서 경제부처는 영리병원을 도입하자고 주장한지가 오래됐다. 김대중 정부시절, 또는 그 이전부터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영리병원을 도입하자는)그런 주장을 제기해 왔다. 당시에도 영리법인 허용 주장은 경제부처의 주장이었다. 반면 복지부는 내부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역대 복지부 장관은 모두 다 반대를 했다. 특히 고 김근태 전 장관은 (영리병원 허용에)강력히 반대했다.

-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을 역임했다, 당시 청와대 내부적으로 영리병원 도입 검토에 대한 의견은 어땠나.

“당시 유시민 복지부 장관이 대통령께 (영리병원 도입 정책을)할 수 없다고 보고 했다. 그 대신 병원의 자본조달 방식이나 수입을 올리는 방식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보고했고 대통령 승인까지 받았다. 그 후에는 영리병원 도입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이후 의료법 개정안이 나왔는데 시민단체가 강력히 반대해서 법안 통과가 이뤄지지 못했다.”

-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50% 대에 불과하던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0% 수준으로 강화하고, 전체 병의원의 10%에 불과한 공공병원의 비중을 30%까지 늘리겠다는 공약을 제시했지만 결과적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수치상으로 보면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 맞다. 그런데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정부 운영에 참여하면서 느낀 것은 이렇게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정책은 소위 담론이 형성되고 사회적 합의가 먼저 이뤄졌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공공병원을 30%까지 확충하려면  꽤 복잡한 사안들은 정책적으로 입안해야 하고, 예산도 조달해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건보 보장성 확대로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돼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어서 진척이 힘들었다.

그래도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건보 보장성 확대는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특히 암 질환에 대한 보장성은 참여정부 초기 40% 중반에서 71.5%까지 끌어올렸고, 건보 보장성도 50% 대에서 65%까지 확대시켰다. 이것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야 한다. 공공의료는 병상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 전에는 지방공사의료원이 당시 행정자치부 소관이었는데 복지부로 소관을 이전해 ‘지방의료원’으로 명칭이 바뀌고 적어도 그 병원들이 영리추구를 하는 부문에서는 벗어났다.

도시형 보건지소도 참여정부 시절 개념을 만들어 시범적으로 20여개 운영하던 것이 호응이 좋으니까 늘어나고 있다. 국립의료원을 국가중앙병원으로 육성하는 것은 지금도 추진되고 있으며, 참여정부 말기에 2차 지역균형발전 예산으로 지방 국립대병원에 심혈관센터나 지역암센터 설립 지원을 강화했는데 지금 그 센터들이 각 지역에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전적인 실패는 아니고 말하자면 공공병상 비중을 30%로 가자는 공약은 달성을 못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발동을 걸었다.”

- 의약분업 도입 후 10년이 훌쩍 더 지났다. 이 제도를 기획한 당사자로서 의약분업 도입 후 성과에 대해 평가한다면.

“의약분업은 (항생제나 주사제 처방률 등)여러 가지 지표를 가지고 성패를 이야기하는데 그 지표들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약분업 도입 후 항생제나 주사제 처방률은 비약적으로 좋아지고 있다. 항생제 처방률은 2002년 43.4%에서 2011년에는 27.1%로 떨어졌고, 주사제 처방률은 더 내려갔다. 의약분업 도입 당시에는 이렇게 급격히 내려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상당히 드라마틱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분적인 지표이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의사가 진료와 처방을 하고 약사가 조제를 한다는 것이다. 의약분업 도입 성과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환자를 의사가 진료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업 이전에는 스테로이드제부터 심지어 결핵약까지 (의사의 진료를 받지 않고 약국에서 구입해)복용하던 환자들이 있었는데 분업 이후에는 의사에게 진료를 먼저 받게 된 것이다. 의약분업 그 자체로 획기적인 보건사업을 한 셈이다.

또한 분업 이후 의사들이 불만이 있기는 한데 적어도 약을 쓰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로워졌다는 점은 모든 개원의들이 인정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분업 전에는 의원 내에 가지고 있던 약 중 몇 가지만을 선택해서 처방했는데 분업 이후에는 어떤 약이라도 다 처방하면 조제가 된다. 분업 이전과 비교할 때 개원의들이 의약품 처방 범위나 선택의 여지가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다. 이것은 지표로 나오는 것이 아니지만 그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의약분업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 의약분업 도입의 중요한 정책 목표 중 하나였던 약제비 절감은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의약분업 도입시 원래 계획보다는 상당히 조정되고 후퇴된 부분이 있었다. 우리나라 의약품 자체의 품질관리가 부족해 성분명 처방을 하지 못하고 상품명처방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약값 문제가 생기고 약국은 보유해야 할 가짓수가 늘어나고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의약분업에서 보완해야할 문제이다.”

- 오는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두고 ‘무상의료’가 보건복지 부문의 주요 아젠다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무상의료 정책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재정확보 문제이다.

“무상의료는 정치적인 용어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확대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무상의료를 위한 재원은)기본적으로 건강보험 재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복지 확대에 비해서 재원확보가 더 쉽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건강보험료는 지금까지도 급여 확대가 있을 경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통해 꾸준히 인상돼 왔다. 만약에 보장성이 획기적으로 확대되면 보험료도 그만큼 인상돼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건정심에서 충분히 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 다만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확대할 경우)국가재정이 일부 투입돼야 한다는 점이 관건이다. 건보재정 규모가 커지면 국가지원 몫도 커지는 문제가 있으며, 건강보험 급여가 확대되면 의료급여 수준도 동시에 확대돼야 하기 때문에 의료급여 예산도 추가로 들어갈 것이다. 또한 건강보험료가 올라가면 보험료를 못내는 계층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국가지원을 확대하는 예산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비교적 재정 문제는 쉽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가능성은 건강보험의 급여 확대가 이뤄지면 지금 국민들 대다수가 들고 있는 민간의료보험 부문의 보험료를 인하돼야 한다. 왜냐하면 건보 보장성이 확대되면 민간의보의 영역이 축소될 것이고 당연히 보험료도 조정돼야 한다. 그러면 대다수 국민들은 건보료는 올라가지만 민간의보 보험료는 내려가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 일각에서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보건의료정책에 정치적 논리가 개입되면서 구체적인 방향성 보다는 거대담론에만 휩쓸려 불필요한 논쟁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기에는 원래 이런 이야기를 하는 때이다. (보건의료정책에 있어서)담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보건의료 정책이 가야할 방향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담론적  이야기를 하면서 담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정책이 개발되고 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의료계는 의약분업 만큼이나 무상의료에 대해서도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무상의료가 도입되면 의료수가는 더욱 억제되고, 특히 정부가 실질적으로 의사나 의료기관에 지원하는 것은 없으면서 통제만 더욱 강화될 것이란 우려도 높다. 이러한 의료계의 우려가 잘못된 것인가.

“무상의료가 도입되면 의료수가가 더욱 억제될 것이란 걱정은 기우이다. 만일 무상의료에 가까운 수준으로 급여가 확대되려면 필수적으로 비급여를 전면 급여화해야 된다. 일부 진료과를 제외하면 병의원은 100% 급여가 적용되는 진료를 하면서 운영해야 하는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건강보험 진료만으로 병의원의 운영이 가능하도록 수가를 올려줘야 된다. 진짜로 의료 원가를 방영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의료수가가 낮은 이유는 비급여 부문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설정했기 때문이다.”

- 반대로 수가가 낮기 때문에 비급여를 통해 수익을 보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순서가 어쨌든지 간에 수가를 조정을 해야 되는 것은 사실이다. 누가 책임이 있고,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 국가 차원의 공공의료 확충이 크게 미흡한 상황에서 민간의료기관과 의료인에게 너무 과도한 공익적 역할을 요구한다는 의료계의 불만도 높다. 이런 불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모든 것을 규제로 해결하고자 하면 이런 불만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조장 방식으로,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가야 이런 문제가 풀린다.”  

- 의료계가 한국 의료시스템의 왜곡된 구조를 이야기하면서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저수가 구조에 대해서는 분명히 타당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지만 병원의 종류마다 다르다. 대형병원은 돈을 못 번다고 하지만 몇 백억은 벌고 있다. 하지만 중소병원은 그렇지 못하다. 구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규모가 작으면 생산원가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0~200병상 규모 중소병원은 사실 경영이 굉장히 어렵다. 문제는 그런 병원에 맞춰 보험수가가 책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100~200병상 규모의 중소병원은)생산원가가 워낙 높기 때문에 장비 하나를 도입하더라도 대형병원은 수익을 맞출 수 있지만 중소병원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무상의료를 도입하면서 보건의료 인프라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병원의 공급과잉 상태이며, 특히 규모가 작은 중소병원의 비율이 높다. 이로 인해 병원 전반이 어렵다. 그래서 병원들이 어려운 경우에는 자기재산을 처분하고 시장에서 나갈 수 있는 퇴출구를 열어줌으로써 병원 수를 줄여야 한다. 지금은 의료기관들이 경영이 힘들어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경영이 힘든 의료기관은 국가가 매입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퇴출구를 열어줘 병원 수를 줄이면서 공공병원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무상의료 수준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면 환자들이 더욱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몰려들 수 있다. 그러니까 지역마다 양질의 병원을 지어 환자가 자기 지역에서 안심하고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인프라 개혁이 필요하다. 어쩌면 의료자원의 인프라 개혁이 무상의료를 도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어렵다. 인프라 개혁을 어떻게 하느냐가 향후 보건의료 내지는 의사들의 운명에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민간병원도 공익적 역할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예산 신설이 필요하다. 하나는 민간의료기관이 공익성을 담보로 시설 확충을 하겠다면 정부에서 그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지금처럼 민간병원이 다 알아서 하라는 방식은 안 된다. 민간부문에서 중요한 시설을 갖춰야 될 필요가 있다면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민간병원에서 질병 예방이나 건강증진 같은 공공사업을 수행하면 그 예산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 그동안 시민사회단체와 야당을 중심으로 무상의료 정책 추진을 위한 갖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시된 무상의료 관련 비전은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선언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미 지금은 (무상의료 정책이)선언적인 수준을 넘어서 굉장히 구체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민주당이 이 부문을 간판정책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집권을 할 경우 안할 수 없을 것이다.”

- 현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에 대해 평가한다면.

“전임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는데, 이런 느낌이 있다. 보건의료 부문에 있어서는 이명박 정부가 정권적 차원의 비전이 있는가 하는 점이 조금 의심스럽다. 보건의료를 어떤 쪽으로 끌고 가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고 각 부처가 알아서 하는 상황인 것 같다.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폄하할 생각은 없다. 참여정부 때 만들었던 국립대병원의 공공의료사업 지원은 그 이후에도 계속했고, 의료분쟁조정법도 제정했고 쌍벌제 도입 등 잘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떨어지고 기존의 보장성 수준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성이 없다보니 관련 예산 확보도 안 되는 것 같다.”

- 오는 12월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차기 정부의 보건의료정책 방향은 어떠한 목표를 가장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보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느 당이 집권하든지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양극화와 고령화 문제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면 소득격차가 점점 벌어져 저소득층이 늘어나고 중산층이 저소득층으로 내려가면 가난해지는 위험집단이 많아지게 된다. 특히 중산층이 저소득층으로 떨어지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고액진료비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암에 걸리면 목돈을 지출하고 가정경제가 파탄에 처할 위험이 커진다. 고령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오는 2018년부터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노인층에 진입하면 노인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노인진료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평생건강관리 체계 구축과 보건의료 인프라 개혁 등을 신속하게 정비하지 않으면 고령화에 따른 노인진료비 문제가 국가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닥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수명을 늘리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평생건강관리체계를 갖춰야 한다. 공공병원과 공익적 역할을 수행하는 민간병원을 확충할 수 있도록 보건의료 인프라 개혁이 그래서 중요하다.“

- 지난 2002년 대한의사협회 중앙윤리위원회는 ‘실패한 의약분업 입안과 추진에 관여해 국민에게 피해를 준 책임'을 물어 김 교수에게 회원 자격정지 2년이란 징계를 내렸다. 당시의 심정이 어땠나.

“개인적으로 마음이 편할 수는 없는데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원 자격정지 2년이란 징계를 받고 난 이후 의협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두 차례나 이겼다. 그것은 에피소드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만일 1998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도 역시 의약품 리베이트 비리 문제를 제기하며 의료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는데 망설임 없이 나설 것인가.

“그 당시 내가 참여연대로부터 글을 부탁받았을 때 ‘개혁통신’이란 것이 청와대로 이야기가 들어가는 비공개 채널로 생각했다. 만일 공개적인 채널이었다면 그 글을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양심선언을 했다든지 내부고발을 했다든지 지금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한 일간지가 박스기사를 실었는데 기사 내용보다 헤드라인을 자극적으로 붙이고 ‘양심선언’이라고 하면서 파장이 증폭된 것이었다.(김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며 양심선언 논란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있었던 의료보험 통합이라든지 의약분업은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다시 하라고 해도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외통수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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