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김영란법’과 더 많은 민주주의

[라포르시안]  합헌 결정 이후 한국기자협회가 낸 성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아니, 한국 언론의 민낯을 드러낸 역사적 기록이다.

“취재원을 만나는 일상적인 업무 전체가 규제와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취재 활동의 제약은 불가피해질 것” “사정당국이 자의적인 법 적용으로 정상적인 취재ㆍ보도활동을 제한하고”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한 여당 국회의원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앞뒤를 알 수 없는 논리는 그만두고라도, ‘투쟁’이나 ‘언론의 자유’를 거론하다니 민망하다 못해 비현실적이다.   

피땀 어린 투쟁을 통해 박제된 조문에서 살아있는 권리로 이제 막 숨이 붙기 시작한 언론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평가절하하는 헌재의 태도”, “헌재가 바라는 대한민국 사회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보다 검열과 규율이 앞서는 감시사회임이 이로써 명백해졌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공무원들도 말은 젊잖게 하지만, 근본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공무원의 반응을 전하는 신문 기사 하나를 인용한다(앞부분은 기사고, 따옴표 안은 공무원의 말이다).

일부에선 투명성 제고의 대가로 일부 정책조정 기능이 약화될 우려를 제기했다. 현실과 접목된 정책 수립 및 시행을 위해서는 다양한 대민 접촉이 불가피한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게 되리란 예상이다....“정책 결정 과정에 공식적인 의사소통만으로는 다양한 이해관계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워 비공식적인 창구를 활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아무래도 그런 부분은 조심할 수밖에 없다”며 “대외관계를 맺는 부서는 특히 난감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우리도 이런 어법에 익숙하다. 총론 찬성 각론 반대? 본심은 백 퍼센트 반대다.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 그냥 싫다는 뜻이다. 김영란법(정확한 이름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이제 시작이다.

일부 공무원과 언론의 반응이 조롱거리가 된 것은 당연하다. 공짜 밥과 술, 선물과 돈을 그렇게 많이 받는가 하는 것부터, 무얼 어떻게 하기에 3만 원으로 밥도 못 먹느냐는 타박까지. 공무원과 기자들이 뭘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부정부패의 경제 규모가 이렇게 큰가. 이해하지 못할 변명과 변호가 한둘이 아닌데, 다들 ‘부작용’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거론되는 많은 부작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접촉, 홍보, 의사소통, 취재원 등으로 표현되는 ‘네트워크’가 동요하는 것은 부작용이 아니라 ‘순작용’이라고 본다. 공무원과 언론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으니 좋은 방향, 즉 순작용이라 할 수밖에.

이 법이 기대하는 바, 금품수수와 부정청탁을 없애는 것은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이 법 시행을 계기로 공직자(언론인가 사립학교 교직원을 포함해서)들이 지금보다 덜 만나고 덜 어울리고 대화(!)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담이 아니다. 적어도 그런 네트워크는 해체되거나 느슨해져야 한다. 치우친 ‘비공식’ 관계를 교정하려면, 차라리 고립되라.

정치인, 공무원, 기자, 교수, 사학재단을 가릴 것 없다. 이른바 ‘공직자’가 늘 만나고 어울리는 사람, 듣는 소리, 부탁받는 것은 편파적이다.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는 특별한 만남은 더하다. 3만 원짜리 밥을 살 수 있는 ‘민(民)’(대민 접촉이라고 할 때의 그 ‘민’), 5만 원 선물을 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창구’, 10만 원 경조비를 낼 수 있는 ‘취재원’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향응과 불법, 부정만 없으면 괜찮다, 그래야 한다 생각하기 쉽다. 아니다. ‘악마’는 오히려 합법과 공무라는 외피 안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공직자가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의 아이디어를 얻는 데에는 당연히 지식과 정보,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인정한다. 문제는 그 구조가 (완전히)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는 대민 접촉, 비공식적인 창구, 대외 관계도 중립적이지 않다. 툭하면 재래시장에 나가고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쇼일 뿐, 현실은 철저한 불평등과 치우침이다. 건강보험을 다루는 보건복지부 공무원은 누구를 주로 만날까? 비정규직 문제를 맡은 고용노동부 관료는? 사드 배치를 결정할 때의 ‘비공식적’인 창구는? 특히 3만 원을 넘는 밥과 술을 먹는 것이라면.

평범한 환자와 동네 의원의 의사, 노동자와 중소기업, 성주의 농민을 만났을 리 없다. 작은 식당 주인과 축산 농가가 공무원과 밥 한번 먹을 기회가 있을까. 좋은 마음에 삼겹살에 소주를 사고 싶어도 기회도 잡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이라 부르든, ‘참여’에는 무슨 협회와 단체, 회사, 조직이 개인을 압도한다. 권력을 반영한 철저한 불평등과 우선순위가 작동하니, 단체와 집단이라고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치우친 만남의 결과가 어떤지는, ‘명약관화’라는 상투어로도 모자란다. 

언론이 더 심할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취재원과 취재 활동은 철저하게 기존 질서와 구조에 의존한다. 기자실과 홍보실, 그리고 보도자료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거기에 설명회와 간담회, 워크숍, 취재 지원에 이르면, 그것은 ‘만남’의 거대한 구조다. 이것이 “취재원을 만나는 일상적 업무”의 전부라면, 거기에 무슨 서민, 소비자, 노동자, 환자가 들어갈 틈이 있을까.   

흩어져 있는 개인, 무력한 소수, 아무런 자원이 없는 조직은 언론에 접근하기도 어렵다. 여기서도 다시, 조직과 협회, 자본이라 해도 다 같지 않다. 철저한 권력관계와 위계가 작동하니, 삼성과 LG 사이도 다르다. 불평등한 만남의 결과는 우리가 늘 신문과 방송에 보는 그대로, 차마 ‘언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일이 벌어진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권력 구조가 이러하다면, 평범하고 무력한 개인과 집단은 사회적 의사결정에서 배제된다. 공론장은 물론, 나와 우리의 문제에도 의견을 내고 참여하기 어렵다. 민원을 내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소비자는 불만이 있어도 압도적 자본 앞에 무력하다. ‘민주공화국’은 어디에도 없다. 

실패하는 민주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해도, ‘김영란법’은 미미한 견제 장치 이상이 되기 어렵다. 청탁과 금품은 권력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가장 적극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으니, 민주주의를 저지하는 완강한 구조에는 미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학연과 지연. 새롭고 정의로운 권력과 그 네트워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그래도 우리는 이 법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 윤리나 공직자의 자세, 부패를 문제 삼는 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나) 두 번째 가치다. 더 넓고 깊은, 그리고 일상이 되는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 우선 반(反)민주적인 권력관계를 드러내야 한다면, 이 법이 작으나마 보탬이 되리라고 믿는다.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법은 더 강화되어야 하고, 그들만의 ‘은밀한’ 만남은 더 불편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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