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뉴스의 나라 /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언제부터인가 기억은 분명치 않습니다만, 신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 지나가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배달되는 종이신문은 물론 인터넷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실이나 집에서도 분명 종이신문을 구독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처음에는 종이신문이 손을 떠나더니 지금은 인터넷신문마저도 꼼꼼하게 읽지 않고, 제목만 훑어보고는 관심이 가는 제목만 열어서 기사를 읽고, 필요하면 블로그에 스크랩합니다. 정치나 경제는 워낙이 큰 관심이 없었던 터라 그렇다고 쳐도 문화 혹은 건강면까지도 도매금으로 넘어간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라는 부제가 달린 <나쁜 뉴스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같습니다. 신문을 다시 읽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나쁜 뉴스의 나라>의 저자 조윤호 기자는 신문을 포함한 언론이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 작금의 위기상황은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와 언론이 자초한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향응을 받고 특정인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주거나, 있을 수 없는 오보를 내거나, 권력기관에서 흘리는 대로 받아쓰거나, 혹은 기사를 통해서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의 행태를 고발하는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된 것이 영양을 미쳤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영화가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수 없다고, 무언가 이야기를 전개할만한 꼬투리는 현실에서 얻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하여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은데다가 같은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 언론을 외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믿어도 될지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할지는 물론 좋은 뉴스인지 아니면 나쁜 뉴스인지 판단하는 일까지도 결국은 정보소비자의 몫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서슬이 퍼렇던 유신독재 시절에는 신문을 읽을 때 기자가 행간에 숨겨둔 의미를 찾아 읽어야 했습니다. 읽고 있는 기사를 통해서 기자가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다시 눈을 부릅떠야 하는 시절이 되돌아온 셈일까요?

저자는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여 뉴스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우리 저널리즘의 관행과 방침, 시스템을 알아야 좋은 뉴스를 골라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런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일하고 있는 ‘미디어 오늘’이라는 언론사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미디어 오늘’은 기자들을 상대하면서 언론을 감시하고, 언론을 취재하는 언론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미디어 오늘의 기자들은 ‘이 기자는 왜 이런 기사를 썼을까?’를 고민하고 취재하는 게 일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진단하고 치료방법을 제시하고 미래를 도출한다는 전략에서 책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레기와 찌라시 전성시대’라는 자기비하적인 자아비판을 통해 이런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어서 ‘뉴스란 무엇인가’에서는 뉴스 본연의 자세를 논한 다음, 초급, 중급, 고급편으로 나누어 '나쁜 뉴스 가려내기'의 방법을 정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뉴스의 미래, 짐승 뉴스의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언론이 상대해야 할 경쟁자는 누구이며,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이 마주하고 있는 위기상황은 자초한 일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는 저자는 그 이유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누락하거나 축소하고 왜곡하는 것. 언론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채 특정 정치 세력을 옹호하는 행위, 바로 정파 저널리즘이 언론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진 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사건이 일어나고 사건과 관련된 뉴스가 봇물을 이루던 2015년 5월 14일 미디어 오늘이 단독으로 내보냈던 ‘유병언 계열사에 창조경제 지원금 67억 들어갔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누리꾼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오히려 배용준과 박수진이 결혼한다는 뉴스가 동시에 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창조경제 지원금 기사는 기사로서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라서 주목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배용준-박수진 결혼설이 그 순간에 왜 나왔겠느냐는 누리꾼들의 의혹이 만들어낸 음모론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그 기사에 달렸던 ‘이젠 다들 알죠. 연예인 특종이 뜨면 뭔가 있다는 것을’이라는 댓글이 시사하는 것처럼 음모론은 근거 없이 확산되기도 합니다.

당연히 음모론의 대상이 사실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례로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선거가 있던 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장애가 발생하여 투표소를 검색하려던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던 사건이 유력한 야당후보의 보좌관의 짓이었음이 밝혀졌던 사건을 들었습니다. 음모론에 곁들여 찌라시 소식도 사실을 왜곡하는데 한 몫을 한다는 사실을 2007년 대선의 화약고로 지목되었던 BBK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들이 이명박후보의 동업자였던 김경준을 회유하고 협박했다는 내용의 ‘시사IN’의 보도가 허위가 아니라는 판결이 있던 날에도 서태지-이지아 결혼설이 나왔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언론의 위기를 가져온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가 인용하는 사건들이 주로 정권이나 보수 매체 쪽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수언론이 그런 짓을 했다면 진보언론은 상대적으로 이익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왜 언론의 위기는 보수나 진보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것일까요? 진보 쪽 언론도 마찬가지 행태를 보였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의문은 2008년 광우병파동을 떠 올립니다. 당시 정부와 보수 언론들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관련하여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진보경향의 사람들이나 매체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오면 우리나라에 인간광우병이 퍼져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경향신문 2008년 05월 19일자 기사 “광우병 위험성 이대통령만 못 듣고 있다”참조)

2008년 광우병 파동의 한가운데에 있던 필자는 광우병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부풀리고 있는 진보언론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광우병파동을 경계로 하여 언론은 보수와 진보로 뚜렷하게 양분되었고, 피아가 나뉜 것 같습니다. 즉 상대 쪽에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같은 편은 살살 다루거나 아예 눈을 감는 버릇까지도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언론의 위기는 보수나 진보나 크게 다를 바 없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는 각자의 진영을 비판하다가 호되게 당한 사례로 보수진영의 경우는 TV조선의 <장성민의 시사탱크>의 ‘추적, 남한 종북 계보’편을, 그리고 진보진영의 경우는 한겨레신문의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장사를 넘어라”라는 기사를 각각 인용합니다. 저자는 언론매체가 어느새 정파저널리즘에 빠져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일보도, 한겨레도 믿지 마라. 믿을 것은 오로지 뉴스 소비자의 눈뿐이다(41쪽)라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성 있는 사례는 거의 대부분 보수 쪽 혹은 정부쪽 사례를 들고 있는 편향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는 점은 꼭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뉴스가 해야 할 이야기를 드라마와 영화가 대신한 사례로 웹툰 <송곳>과 드라마 <미생>의 사례를 꼽았습니다. 만화나 드라마와 뉴스를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웹툰이나 드라마는 등장인물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혹은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수월합니다. 하지만 기사는 스토리를 담기에 적절치 않은 구조입니다. 기사는 진실을 담아내는 것으로 독자가 좋은 뉴스로 인식할 수 있다면 제 할 도리를 다하는 셈입니다. 감동을 담아내기 위하여 기사를 윤색하게 되면 아무래도 사실이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기자는 보고 들은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걸러내면 되는 것이지, 사실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담아서 독자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인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JTBC뉴스룸 <팩트체크> 방송화면 갈무리.

뉴스가치가 조작되는 사례를 읽으면서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자가 인용한 사례는 청주청원경찰이 기소중지자를 검거하는데 신임여경이 활약했다는 보도자료입니다. 사실 보도자료는 정부는 물론 공공기관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만들어 언론사에 제공합니다만, 기사로 만들어지려면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 특별한 무엇을 조작했다는 지적을 하고 있어서 보도자료를 만들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도자료를 만드는 사람과 그 보도자료로 기사를 쓸까를 결정하는 기자와는 눈높이의 차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북소리]가 연재시작 이후 처음으로 나가지 못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기사에 대한 눈높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은 전후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도 드려야겠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으로 걸린 차량이 대통령께서 탑승하셨는데 행선지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하여 단속한 경찰을 특진시키도록 했다는 결말입니다. 행선지를 밝히지 않으려면 경찰단속 내용을 묵묵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일부러 대통령께서 탑승하셨다고 광고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작가는 JTBC의 손석희 사장이 담당하는 뉴스룸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JTBC뉴스룸의 팩트체크제작팀이 내놓은 <팩트 체크>를 자화자찬하기 위하여 내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핵심이라고 할 ‘팩트체크가 제대로 되었는가?’와 함께 ‘정치적 의도는 없었는가?’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JTBC뉴스룸이 아젠다 설정에서부터 아젠다 키핑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점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젠다 키핑이란 주제를 놓치지 않고 심층보도한다는 의미 같습니다. 하지만 시청자가 관심을 둘만한 다른 주제가 아젠다 키핑이라는 프레임에 물려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부작용도 지적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젠다 키핑 이야기가 나온 김에 꼭 짚고 넘어갈 일은 저자가 일하고 있는 업계에서나 통하는 은어 혹은 외래어를 지나치게 남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사의 꼭지를 ‘야마’라고 하는 업계의 속어는 진즉 사라졌어야 할 것이 아직도 애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적어도 국어를 아름답게 가꾸고 이어가는데 앞장서야 할 기자세계에서 말입니다. 필자 역시 몇 개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만 외래어는 최대한 피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씀으로 해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리말에 친숙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저자가 일하고 있는 미디어 오늘이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보도한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온 뒤에 냈다는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 혼외자식만 4남 2녀’라는 기사가 물타기는 아니었다는 해명으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가 조선일보 너희는 얼마나 깨끗한데 채동욱 총장을 괴롭히냐’는 의미로 해석됐다는 뜻이다(169쪽)”이라고 적고 있어서입니다. “~해석됐다는 뜻이다”라는 설명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것으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포털의 위력이 언론매체의 힘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한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짐승 뉴스의 전성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터넷 신문은 물론 종이신문 역시 수명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이 현재에 안주한다면 모를까 말입니다. 어떻든 독자 입장에서는 좋은 뉴스를 가려내는 능력을 갖추면 되는 셈이니,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쁜 뉴스의 나라>는 참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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