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가습기 살균제, 학계와 언론은 무죄인가?

[라포르시안]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수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구속된 사람이 나왔다. 서울대 조 아무개 교수가 옥시레킷벤키저의 부탁을 받고 유리한 보고서를 써주었다는 것이 이유다. 민원 공무원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수뢰후 부정처사’라는 어려운 이름의 죄목이 붙었다.  

그는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돈에 양심을 판 파렴치한 학자로 낙인찍혔다. 여론 재판만으로 경제 범죄의 ‘유죄’ 판결을 받은 셈이다. 당사자가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고 하니, 자초지종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그 속사정을 충분하게 알지 못한다. 그 돈이 뒷돈인지 아니면 (비싼) 자문료 명목인지, 보고서를 정말 조작했는지 아니면 ‘정리’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짐작하건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지루한 공방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첫째, 회사가 요구한 대로 실험결과를 조작한 경우.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범죄다. 그러나 솔직히 의심스럽다.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연구결과를 조작할 정도로 ‘용감한’ 연구자는 드물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이 연구가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까? 돈에 눈이 멀었다고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일반인이 볼 때 그가 옥시로부터 받은 연구비(그리고 개인 통장으로 받은 돈도)가 작은 액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운영하던 전체 연구비와 비교하면 이번 연구비가 그렇게 클까? 예를 들어, 2010년의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해당 교수가 ‘나노 독성’을 주제로 6년간 39억 원이 넘는 연구비를 지원받는다고 되어 있다.

둘째, 제대로 연구한 결과를 전달한 경우.

이렇게 되면 기업이 지은 죄가 무겁다. 연구결과를 조작한 셈이니 말이다. 연구자에 대해서는 ‘태산명동 서일필’로 귀결될 수도 있다. 구속에 적용된 죄의 이름이 ‘수뢰’라는데, 돈 문제를 빼면 죄를 묻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뇌물죄’란 또 얼마나 불안정한가.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 요구, 약속하는 것이니, ‘직무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바로 허물어진다.

우리의 관심은 두 번째다. 형사상 책임을 면하면 다 괜찮은 것인가? 또는 연구 자문비나 사례비를 받아 마음대로 쓴 정도만 문제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실정법을 얼마나 위반했는지 아직 잘 모른다. 아직은 형사상의 유무죄를 판단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그리고 사법 조치의 초점이) 실정법 위반에 집중되는 것도 마땅치 않다. 이번 사건의 경우 그 이상의 윤리와 양심이 있고, 우리는 그 기준을 위반했는가 물어야 한다. 이는 곧 역사와 양심의 법정이 어떻게 판단할까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실험을 하고도(실험결과를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는 점이다. 재판 과정에서 더 상세한 것이 드러나겠으나, 지금까지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독성이 있다는 실험결과를 얻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일차실험을 한 결과 “살균제에 노출된 임신한 실험쥐 15마리 중 새끼 13마리가 배 속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회사 보고서가 조직이든 아니든, 우리가 문제로 삼는 것은 연구자가 침묵했다는 사실이다. 예비실험, 일차실험, 연구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 그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독성’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의 처분은 연구를 발주한(계약서의 ‘갑’인) 회사가 알아서 할 일이었던가?

제대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회사에 전달했으면 연구자는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았다. ‘내부’ 논리에 충실했고 ‘내부’ 규정을 준수했으면 그는 무죄다. 회사가 결과를 조작하고 이를 제출했다고 가정하자(아직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연구자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꼭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제품은 이미 판매금지가 되었으니, 연구결과는 오로지 재판에만 활용된다고 판단했을까? 계약서에는 의뢰한 쪽의 허가 없이 연구결과를 공표하지 못하는 조항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어느 연구인들 결과가 100%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의심과 ‘불확실성’이 작용하는 것도 당연하다. 정의의 판단은 사법부에 미뤘을 수도 있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연구와 연구결과는 의뢰한 쪽의 ‘주문’에 충실했고, 결과적으로 그 ‘이해관계’에 정확하게 복무했다. 제품이 계속 팔리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질문은 더 명료해진다. 일반적으로 연구와 연구자에게 요구하는 모든 ‘제도적 윤리’는 무력하다. 제도적 윤리란 정확하게 연구하고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논문) 연구비의 출처가 어딘지를 밝히는 정도.

시장의 거래 관행과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한, 제도화된 윤리를 어기지 않는 한, 그는 무죄인가?

비슷한 질문을 해야 하는 집단이 또 있으니 그들은 언론이다. 언론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언론 보도가 잇따르면서” 이 문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도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된 데에는 그들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피해자 대표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 낫겠다.   

"언론에서도 처음부터 정부나 검찰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때, 추적 보도를 해줬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진 않았을 것 같다"라며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관심가지고 보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언산(言産)복합체’라고 말하면 오히려 진실이 모호해질 수도 있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언론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보다 기업과 밀접하다. 광고나 ‘청부’ 기사를 통한 유착은 말할 것도 없다. 보도자료를 내고 (기사가 될 만한) 행사를 하는 기업의 능력은 피해자 가족이나 시민단체와 아예 비교 대상이 아니다. 

1995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가습기 살균제 광고. 이 광고는 온 가족 건강을 위해 가습기 살균제 사용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04년 겨울에 한 신문에 실린 기사다. 이 기사가 어떻게 작성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기사를 어떻게 취재하고 신문에 싣기로 했을까. 누구나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다.  

“가습기 전용 살균제를 사용하는 것도 가습기를 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것으로 애경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1,000㎖ 3,950원선)와 옥시싹싹 가습기당번(550㎖l 2,200원선) 등이 있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이 기사는 그야말로 사소한(!) 예일 뿐이다. 기자가 아닌 그 누구라도 쓸 수 있을 정도의 ‘청부’ 기사는 오늘도 차고 넘친다. 의심스러우면 그 어떤 신문도 좋으니 오늘 경제면, 생활면을 보시라. 기업이 낸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낀 기사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정을 설명하는 핑계와 변명도 익숙하다. 기자가 모자라고 취재 여건이 되지 않는다, 독자가 좋아하는(필요로 하는) 기사다, 생활에 필요한 정보 아닌가…. 모두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현재의 여건과 언론 환경, 독자의 필요를 동원하면 언론은 무죄인가?

이번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학계와 언론이 기업과 유착한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아마도 잠깐 반성의 움직임이 뒤따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을 개별 사례로 이해하는 한,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기업 권력이 학계와 언론을 ‘지배’하는 구조가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사건, 또는 앞으로 예정된 사건들은 한둘의 일탈이 아니다. 세부 제도와 실무 규제를 강화한다고 해결될 수 없는, 그야말로 ‘구조’의 문제다. 에릭 올린 라이트가 <리얼 유토피아>에서 쓴 표현을 빌리면, ‘경제 권력’이 ‘국가 권력’과 ‘사회 권력’을 통제하는 현실.   

지배의 심각하고 두드러진 결과는 현상적으로 ‘돈줄’(예를 들어 연구비와 광고)을 누가 쥐는지에 그치지 않는다. 이해관계든 가치의 내면화든, 학술과 언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많은 현실은 이로부터 빚어진다.

어떤 연구(활동)와 언론(기사)도 가치중립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그리고 ‘정설’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연구와 언론이 그것을 부인하는 데에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분명한 편향을 중립으로 가장한다. 그 내용과 질도 문제지만, 일차적으로는 양이 압도적이다. 평범한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는 학술과 언론이 너무 적다.

이 도저한 흐름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학술 연구만 하더라도 그렇다. 국가 또는 기업과 무관한 연구비(특히 실험과학의 경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연구의 본산 노릇을 해왔던 대학은 기업이 된 지 오래다. ‘대안’의 기반은 전혀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학계와 언론은 성찰하고, 제3자는 감시하고 드러낼 것. 소극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의 삶과 현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참’의 힘에 희망을 건다.

모든 사정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만 하더라도 ‘중립적’인 연구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피해자들로부터 피해조사를 의뢰받은 환경보건학회 소속 학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비를 들여 연구를 수행하고 결과를 발표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 ‘시민과학’, ‘대항 전문가’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고 박상표도 잊을 수 없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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