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 깊은 의미야 이해하기 힘들지만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사유(思惟)를 지배하고,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라는 뜻으로 짐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리라.

언어가 '존재의 집'이란 걸 보건의료 분야에서 명확히 체득할 수 있다. 질병의 명칭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그 병을 앓는 환자의 사회적 지위마저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병명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환자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지고 사회적 편견을 불러온다. 나병(문둥병), 간질, 정신분열병 등의 병명이 그랬다. 이들 질병은 지금은 각각 한센병, 뇌전증(腦電症), 조현병(調絃病)으로 불린다. 오랜 시간 사회적 합의와 그에 따른 관련 법개정이란 지난한 절차를 거쳐 이름이 바뀌었다.

병명이 달라졌다고 금방 사회적 편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랜 시간 불리면서 각인된 것처럼 또한 그걸 지우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병명을 바꿈으로 해서 가장 크게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사회적 편견과 낙인이 두려워 적극적인 치료에 나서지 못하던 환자들이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거다. 조현병으로 병명이 바뀐 정신분열병의 경우 병원을 찾아 진료받는 환자 수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치매'는 중대한 공중보건 문제로 떠올랐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치매 유병률은 9.6%이고, 전체 치매환자는 61만2천명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 가족들이 그 병명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아버지는 미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이 쓴 글이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둔 어느 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치매(癡呆)라는 병명의 한자어가 '미치다,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치매 환자를 곧 '어리석고 미친 사람'처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런가 싶어 한자사전을 찾아봤다. 치매의 한자어 모두 '어리석다, 미련하다, 미치다'는 의미였다. 퇴행성 뇌질환 또는 뇌혈관계 질환 등으로 인지기능이 떨어지거나 상실되는 질병임에도 고약하고 인권침해적인 '존재의 집'에 가둬버린 것이다. 이 학생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아픈 환자이지 '미친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청와대, 보건복지부, 국립치매센터, 서울시 등에 편지를 보내 병명의 명칭 변경을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치매라는 명칭에 대해서 문제인식을 갖고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앞서 지난 2006년에 보건복지부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시행을 앞두고 치매의 명칭 변경을 추진했지만 어쩐 일이지 성과가 없었다. 지난 2011년에는 한 국회의원이 치매라는 병명이 뇌질환으로서 해당 질병의 특징을 왜곡하고 환자와 그 가족에게 모멸감을 준다는 이유를 들어 '치매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처럼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일본과 홍콩, 대만 등의 국가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이들 국가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벌써부터 치매 대신 '인지증(認知症)', '실지증(失智症)', '뇌퇴화증(腦退化症)'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병이나 간질, 정신분열병이라는 명칭을 변경하는 데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대한조현병학회가 2007년 정신분열병의 명칭을 변경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약 4년 만에 관련법 개정이 이뤄졌다. 어렵게 병명이 바뀐 이후에도 여전히 고약하고 인권침해적인 스티그마((stigma)가 남아 있다. 보험사는 여전히 조현병 진료기록이 있을 경우 보험가입을 꺼려한다. 뇌전증으로 병명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등급표에는 지금도 '간질 장애'로 남아 있다. 의료 전문가들조차 변경된 병명 대신 기존의 명칭에 익숙해서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언론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고약한 병명으로 부를 때가 있다. 

편견으로 가득 찬 '사회적 낙인'이나 다름없는 병명이 초래하는 가장 큰 폐해는 환자가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조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을 숨기면 만성화되고 결국에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부담만 더 커진다. 그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때 ‘낙인이 찍힌 이방인’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된다. 비로소 적절한 치료를 받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잘못된 병명이 환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거다. 사회 전반에 걸쳐 질병의 명칭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5월 신종 감염병의 이름을 지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감염병의 명칭으로 인해 해당 환자나 특정 지역, 동물 등에 부정적인 낙인 효과를 불러오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환자에게 있어서 질병의 명칭이 '존재의 집'이나 다름없음을 인식한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제3차 치매관리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당초 이번 종합계획을 수립하면서 치매의 병명 개정에 관한 내용을 반영하기 위해 의견을 수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정작 그 내용은 없었다.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50만 치매 파트너즈를 양성하겠다는 뜬구름 잡는 계획만 눈에 띄었다. 국가차원의 치매 관리가 필요할 정도로 중요한 공중보건 사안임에도 왜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지속적으로 호소하는 문제를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그 이유를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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