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안 브리핑]

[라포르시안]  2009년 전세계를 할퀴고 간 H1N1 인플루엔자, 일명 '신종플루'는 유럽에 황당한 흔적을 남겼다. 판뎀릭스(Pandemrix, 사진)라는 신종플루 예방백신을 접종받은 사람들 중 1,300여 명이 기면증(narcolepsy)에 걸린 것이다. 기면증이란 대낮에 주체할 수 없는 졸음을 유발하는 난치성·심신쇠약성 질환으로, 간혹 웃음이나 분노와 같은 강력한 감정에 반응해 근력저하(muscle weakness)를 동반하기도 한다.

판뎀릭스의 제조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백신과 기면증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일부 환자 및 가족들에게는 배상도 했지만 판뎀릭스가 기면증을 유발한 원인은 지금껏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마침내 지난주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STM)'에 실린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판뎀릭스가 기면증을 초래한 원인을 규명했다고 주장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판뎀릭스가 만들어내는 항체가 바이러스에만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뇌세포의 특정 수용체(수면을 조절하는 수면체)에도 결합해 기면증을 유발한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3,000여 만 명의 유럽인들이 접종받은 판뎀릭스가 일부 유전적 고위험군에게 자가면역반응을 일으켰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스톡홀름 소재 유럽 질병예방통제센터의 파시 펜티넨 소장은 "연구진은 설득력있는 증거들을 모아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시했다.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이런 연구결과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해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구진과 다른 기면증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번 연구는 대규모 연구를 통해 재확인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2013년 다른 연구진이 STM에 기고한 논문에서는 다른 종류의 백신유발성 자가면역반응(vaccine-triggered autoimmune reaction)을 언급했다가, 연구결과가 재현되지 않자 철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면증은 유럽에서 3,000명당 한 명꼴로 발생하는 수수께끼 질환으로, 대부분 소아기나 청소년기에 발병한다. 환자들은 시상하부에 존재하는 특정 뇌세포를 상실해 히포크레틴(hypocretin)이라는 분자가 부족해지는데, 히포크레틴은 수면-각성주기(sleep-wake cycle)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자들은 자가면역질환이 기면증을 일으킨다고 의심해 왔는데, 그 이유는 상당수의 기면증 환자들(백신유발성 기면증과 유사한 기면증 환자의 경우 거의 100%)이 조직적합성항원(HLA) 유전자에 특정 돌연변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2010년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들 중에서 기면증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탠퍼드 대학교의 로런스 스타인먼 박사(신경과학)와  당시 노바티스의 백신 및 진단부분 임상과학 팀장을 맡고 있던 소헤일 암헤드 박사(류마티스학)가 뇌에 발현된 단백질 중 백신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 용의자가 하나 발견됐다. 그것은 히포크레틴 수용체를 구성하는 부분품으로, H1N1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핵단백질(nucleoprotein, 바이러스의 복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단백질)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암헤드 박사는 "그것은 바로 유레카의 순간이었다"라고 암헤드 박사는 회고했다.스타인먼 박사와 암헤트 박사는 "인플루엔자 백신은 인플루엔자의 표면단백질에 대한 항체를 만들도록 설계된다. 만약 백신이 핵단백질에 대한 항체까지도 만들어낸다면 히포크레틴 수용체에도 결합하여 궁극적으로 세포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핵단백질이 기면증의 발병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증거를 이미 제시한 바 있다. 작년 12월 헬싱키 대학교의 오우티 바랄라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은 "판뎀릭스가 또 다른 백신(아레판릭스)보다 핵단백질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레판릭스는 GSK가 만든 백신으로, 기면증 유발 위험이 훨씬 더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연구진은 "판뎀릭스에 포함된 핵단백질을 어린이 기면증 환자들에게 투여해 본 결과, 면역반응이 변화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번에 STM에 게재된 연구에서 연구진은 핀란드의 기면증(판뎀릭스 유발성 기면증) 환자들에게서 채취한 혈청을 인간세포(인간의 히포크레틴 수용체를 발현하도록 만든 세포)에 첨가해 보았다. 그랬더니 환자의 혈청 속에 포함된 항체들이 20개의 세포 중 17개 세포에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바티스가 만든 포세트리아라는 백신을 접종받은 이탈리아인들의 혈청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판뎀릭스와 포세트리아의 성분을 비교해본 결과, 판뎀릭스의 핵단백질 함유량이 포세트리아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백신이 기면증을 일으킨다면, 신종플루나 기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기면증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좋은 질문이다. 중국의 경우 2009년 신종플루가 휩쓸고 지나간 후 기면증 환자가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중국에서는 판뎀릭스가 접종된 적이 없다. 또한 과학자들이 일부 신종플루 환자들의 혈청을 채취하여 실험실에서 인간세포에 투여해 본 결과, 실제로 히포크레틴 수용체에 결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번 연구의 공저자인 핀란드 투르쿠 대학교의 일커 율쿠넨 박사(바이러스학)에 의하면, 속단은 금물이라고 한다.

한편 관점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번 연구결과는 기면증 자체를 치료하는 데도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댈하우지 대학교의 노니 맥도널드 박사(소아백신 연구자)는 "과학자들은 히포크레틴 수용체에 대한 항체결합을 차단할 경우 히포크레틴 시스템을 복구할 수 있는지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연구는 인플루엔자 백신의 안전성을 향상시키는 방법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핵단백질의 수준을 낮추거나, 수용체와 유사한 단백질의 특정 부분을 제거하는 방법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율쿠넨 박사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백신유발 기면증의 발생 메커니즘을 규명함으로써 그런 사태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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