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2015년 새해, 평범한 희망을 배우자

[라포르시안]  새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안타깝고 답답하다. 버릇처럼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미덥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작년보다 나을 것으로 생각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리라. 덕담을 나누기도 민망하다.

우선 경제가 좋아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 정부는 경제성장률 전망치로 3.8%를 제시했지만 너무 낙관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여러 경제 연구소나 민간기관의 예상은 이 보다 낮다.

경제 심리가 나쁜 것을 보면 다들 비관적 시나리오에 동의하는 모양이다.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한국은행이 조사하는 소비자 심리지수는 2014년 초부터 계속 나빠져 12월에 최저를 기록했다.

 

▲ 출처 : 한국은행 소비자동향조사

그나마 볼 수 있는 경제 전망은 총량만이다. 평범한 장삼이사의 삶, 서민의 살림살이, 한 집안의 경제는 어떨지 묵묵부답이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낙수효과에 기대하고 있는지, 전체 성장률 아니면 대기업의 경기 전망에만 목을 맨다.

가계 부채, 전월세 사정, 일자리, 비정규직, 세금 등 서민 경제의 전망은 어느 것 한 가지 밝은 기운이 없다. 정부가 몇 십 년 묵은 오랜 패러다임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사정은 더 나빠질 것이다. 거의 모든 외부 요인이 개인의 경제를 직접 위협할 것 같다.

정치적으로도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정치의 본령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구성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망을 제시하고 뜻을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갑자기 그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무력화와 왜곡이 더 심해지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현실 정치는 고단한 현실을 위로하기보다는 짜증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정부가 퇴행적인 국정 운영을 바꿀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꼭 안이한 이념적 지향성만이 아니다. 거의 한 세대를 통해 축적한 많은 근대적 성취가 또 다시 뒷걸음칠 것으로 예상한다. 이것만 해도 고단한 한 해가 될 것이 뻔하다. 

사회적으로도 밝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적다. 경제와 정치가 이런데 어떻게 장밋빛이 될까. 게다가 지금까지의 추세를 되돌릴 만한 계기도 별로 없다. 연대와 협동보다는 ‘각자도생’, 그리고 삶의 질과 인간적 가치보다는 경제의 ‘독재’가 더욱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새해는 어둡다. 희망은 사회적인 것을 떠나 각자 개인 차원으로 옮아갈 수밖에 없다. 이 때 개인의 희망이란 얼마나 착잡한 것인가. 그나마 그것도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새해 우리는 무엇을 계획하고 결심하여야 할까. 비관에 굴복하지 않고, 그렇다고 근거 없는 무모한 낙관으로 잠시 스스로를 위로하지도 않을, 그런 새해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자신하기 어렵다. 새해가 되었지만 좀처럼 희망의 기운이 퍼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관은 자칫 냉소와 조롱, 내면으로의 탈주로 이어지기 쉽다. 절망과 자기 파괴로 가면 더 어두워진다.

역전이 필요하다. 새해 늘 입에 올리는 희망과 꿈을 전복할 것을 제안한다. 희망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가? 많은 이들이 단지 혼란스럽게만 느끼고 있다. … 중요한 것은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 (박설호 옮김. <희망의 원리>, 열린책들 펴냄).희망 배우기. 우선 블로흐의 말대로 희망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며 관념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모습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렇다 희망은 삶의 본질이자 권리다. 올해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배우라니. 어떻게 배우라는 것인가. 우리는 희망을 배우는 것이, 희망과 꿈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루거나 이루어지는 (우리의 밖에 있는 것으로서의) 희망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실천하는 희망”, 어쩌면 하나의 모순이다.

희망은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데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는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된다는 것. 희망은 한번으로 결판을 보는 정권 교체나 개헌, 선거 승리와 같은 사건을 넘는다. 그런 것이 있더라도 그 이후에도 희망하는 것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뒤집으면, 그 이전에도 희망은 삶의 본질로 존재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사건과 완성은 새로운 희망의 계기일 뿐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의 영구성을 훼손하지 못한다.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은 지속된다.

또 한 가지, 희망은 실천하는 과정과 성취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로서의 희망에 익숙하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이루어진 한국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결과와 성취로서의 희망이 오히려 좌절과 절망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오늘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 그런 결과만인가, 블로흐처럼 묻자. 짧은 시간 안에 좋은 대통령을 가지는 것이나 비정규직을 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절망해야 하는 것일까. 공공의료 강화가 좌절하면 희망을 포기해야 할까. 아니다. 그 과정을 실천하는 것, 살아내는 것 또한 가치 있고 더 나아지는 삶 그 자체다.

이렇게 희망을 배우려면 그것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 중요하다. 오래 된 모형이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무엇을 기대하고 희망하는지 날카롭게 벼릴 일이다.

여전히 유효한 것을 새롭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가난(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모든 종류의 가난)과 불평등을 넘어서는 일이 그런 것에 속한다. 그 일은 잠시가 아니라 한 번이 아니라 늘 새롭게 해야 한다.

 특별히 보탤 것은 공간과 터를 회복하는 일이다. 희망과 꿈을 실천하는 것은 시간을 다시 만들 뿐 아니라 공간을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살고 일하고 공부하는 곳 모두가 상호작용의 공간이자 실천의 터다.

다들 가상공간을 말하지만, 직접 대면하는 물리적 공간의 가치는 더 중요하다. 공론이든 공부든 일이든, 공간과 터가 더 많이 만들어지고 넓어지는 것을 바란다. 특히 생활과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실천의 터가 많아지면 좋겠다.

경제가 결정하는 이기주의와 원심의 동력은 모든 것의 개인화로 귀결된다. 여기에 저항하는 실천은 사회적인 것의 복구 그리고 공공의 구축을 구심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물신화한 경제 하나로 수렴되는 위협 속에서 그런 경향성에 틈을 내는 모든 실천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결국 새해 희망을 배우자는 것은 사람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공부하고 생각하며, 더 많은 실천을 해 보자는 것, 이렇게 평범하게 요약된다. 그렇다. 객관적 조건을 이겨 나가는 현장은 그리 신기할 것이 없는 보통의 일상 속에 있어야 한다. 

힘을 합쳐 희망을 배워나가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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