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기억의 파괴 / 로버트 베번 지음 / 나현영 옮김 / 알마 펴냄, 2012년

[라포르시안]  인간이 뛰어난 기억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이란 것이 완전하지 못해서 잘못 인식한 것을 기억하기도 하고 스스로 왜곡시키기도 한다고 합니다. 생소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집단기억’의 개념은 [북소리]에서 소개한 바 있는 제프리 K 올릭의 <기억의 지도>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집단기억’은 에밀 뒤르켕의 문하생 모리스 알브바슈가 1925년도에 발표한 <기억의 사회적 구성틀>에서 처음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기억의 지도>를 감수한 김문조 교수는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식적 가교로써 ‘삶에 보탬이 되는 지혜나 교훈의 교훈’이라는 온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의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려는 집합적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빚는 집단들은 상대 집단의 집합적 열망을 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마련일 것입니다.

대립하는 집단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치명적 사례로 제노사이드가 있습니다. 역시 [북소리]에서 소개한 허버트 허시 교수의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에서 인용한 글을 다시 인용해보면, 제노사이드는 ‘집단학살(集團虐殺)’이라 번역되고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며,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범죄를 일컫는다.”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집단 학살의 정확한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법적인 집단 학살의 정의는 1948년 국제 연합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나온다. 이 협정 2조를 보면 집단 학살을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집단의 일원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고의적으로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집단 내 출생을 막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948년 유엔이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을 마련하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집단이 저지른 것과 같은 대규모 학살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자는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만, 세계대전 이후에 아프리카와 동유럽 등지에서 벌어진 이민족들 간의 전쟁에서 여전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단이 확대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집단과의 부딪히게 되고 필연적으로 전쟁이라는 치명적인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온 일이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도시가 무너지는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상황논리일 뿐, 정복당한 집단이 언젠가는 세력을 키워 복수에 나설 것을 걱정하기 때문에 정복한 집단을 아예 절멸시킨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정복자의 문화청소행위에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애절한 감정을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민족을 말살하려면 먼저 그들에게서 기억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지. 누군가는 그들 책과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지.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다른 책을 쓰고, 그들에게 다른 문화르 제공하고,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고. 그러고 나면 민족은 서서히 자신의 현재 모습과 과거 모습을 잊기 시작하지. 주변 세상은 그 민족을 더더욱 빨리 잊어 가고 말이야.(밀란 쿤데라 지음, 웃음과 망각의 책 297쪽, 민음사, 2011년)”

국제사회의 감시를 의식하여 인종청소행위를 대규모로 저지르지는 못하는 대신 이를 대체할 수단이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로버트 베번의 <집단기억의 파괴>는 제노사이드에 병행하여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집단기억의 말살행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바로 건축물의 파괴와 같은 문화청소행위입니다. 저자는 영국의 건축잡지 <빌딩 다자인>의 전임 편집인을 지낸 건축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입니다.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유럽의 건축유산의 자료화면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는 저자는 인도에서 보스니아까지 무수한 파괴의 현장을 직접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정복자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한 집단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그들의 정신이 담긴 건축물을 파괴해왔으며 또 지금도 파괴하고 있는지를 알아낸 것입니다. 전쟁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가 파괴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도서관이나 미술관 혹은 종교건물과 같이 집단의 현전(現前, presence)의 상징은 특히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답니다. 이들 건축물들은 역사적 기억의 저장고이자 특정 집단의 현재를 과거 그리고 미래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건축물이 파괴되는 것은 전쟁의 부수적인 피해가 아니라, “건축물과 장소에 깃든 기억과 역사와 정체성의 말살, 즉 망각의 강요 그 자체가 목적인 분쟁에서 일어나는 특정 건축양식이나 전통에 대한 적극적이면서도 조직적인 파괴다.(9쪽)”라고 저자는 잘라 말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집단학살과 인종청소의 과정에서 건축물이 맞는 숙명을 살펴보고, 건물을 표적으로 한 테러 활동과 정복 활동, 사람들을 분산시키거나 결집시키기 위해 구조물을 세우거나 철거하는 행위, 과거의 잔해 위에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혁명적인 새 질서로 파괴된 건물들을 짚어가고 있습니다. 1938년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나치의 선동을 받은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집과 사업장, 시너고그 등을 습격한 사건)로부터 시작된 나치 독일의 광범위한 유럽문화 말살행위는 물론,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의 배려로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된 이스라엘이 선주민 팔레스타인 사람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행위들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코소보 내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 강경주의자들에 의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무슬림 문화의 파괴 실태,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신구교의 충돌, 중국 정부가 티베트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저지른 문화파괴 행위 그리고 문화혁명기간 동안 저지른 중국의 권력층이 저지른 자기문화 파괴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뒤쫓고 있습니다. 다만 지리적 혹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중심으로 서술하지 않고 문화파괴의 형태에 따라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어 사건들이 중복하여 인용되다보니 맥락이 매끄럽지 못한 느낌도 남습니다. 저자가 골라낸 주제어는 문화청소, 사기와 선전전으로 포장된 테러, 정복과 혁명, 갈등을 일으키는 분할, 그리고 재건 등입니다.

▲ 크리스탈나흐트에 불타고 있는 유태인 예배당.

집단 간의 충돌은 대체적으로 종교적 이념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문화파괴행위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용을 강조했던 시기에조차 라이벌의 종교적인 건축 유산을 파괴하는 쪽이었다. 반면 이슬람교는 비록 일관적이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믿음이 없는 자’들의 교회를 다루는데서 좀 더 유연했으며 파괴하기 보다는 모스크로 개조하는 쪽을 택했다.(27쪽)” 이슬람의 이런 관념은 바로 스페인의 코르도바 메스키타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785년 건축이 시작된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로마인과 서고트인들이 세웠던 교회에 지은 이슬람 사원인데, 메카의 사원양식을 고집하지 않고 교회의 주춧돌과 기둥, 건축양식까지 고스란히 이용하여 전형적인 교회 평면구조의 회교사원인 새로운 칼리프양식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김희곤 지음, 스페인은 건축이다 138-146쪽, 다산북스, 2014년).

물론 탈레반이 저지른 바미안석불의 파괴행위와 같이 완벽할 정도로 실효적이지는 못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그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보존하여 후손에 물려주도록 하자는 진화된 문화유산의 보호개념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기념물이나 건축물은 쓸모를 잃으면 파괴되거나 대체 또는 개조되었던 것인데, 특히 자신의 전통이 아닌 문화유산까지도 존중해야 한다는 관념은 거의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건축물이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는 존 러스킨은 ‘건축은 성스러운 기억의 요체이자 수호자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건축이 역사가 되도록 하고,지나간 시대의 건축을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보존할 의무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31쪽, 마로니에북스 펴냄, 2012년) 앞서 유엔의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한 것은 탈레반이 예고하고 실행에 옮긴 바미안석불의 파괴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응방안이 마련되지 못하고 결국은 석불이 파괴되고 말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미안석불의 사례처럼 국제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세르비아 반군에 의한 두브로브니크 포격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서구 언론은 세르비아 반군의 두브로보니크 포격을 세계의 집단 건축유산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포격을 멈추라고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얻었던 것입니다. 다만 두브로브니크에 들어서 있는 후기 르네상스건축물들이 서구인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같은 기간 동안 벌어진 발칸반도 일원에서 벌어진 이슬람유산의 파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미온적인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이슬람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뿌리 깊은 문화적 근시안 또는 적대감 탓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파괴된 문화유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 역시 뜨겁습니다. 저자는 “재건은 그 재건을 가져온 파괴만큼이나 상징적이다. 건설은 파괴된 건축 환경을 이어 붙이거나 예전 삶의 결을 하나로 엮는 데 사용된다. 집단기억에는 새로운 시금석이 놓인다. 한때 비인도적인 기념물, 곧 일상의 예배 장소와 도서관과 분수였던 것은 재건을 통해 파괴를 야기한 사건을 떠올리는 의도적인 기념물이 된다. 역사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간다.(309쪽)”라고 재건의 의미를 새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문화를 파괴해 망각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재건은 특히나 의심스럽다.’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러스킨은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49쪽)”라고 하여, 파괴된 건축물의 재건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표방하는 역사가 유산에 자리를 빼앗기는 사례가 너무 잦다’라고 지적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역시, 유산은 ‘이미 지나간 신념에 바치는 맹세이며 과거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자부심은 유산의 부작용이 아닌 근본인 목표’라고 하여 건축의 재건을 이용하거나 남용하는 이들을 경계하기도 합니다(315-316쪽). 저자 역시 “재건을 통해 건축물을 구조하는 임무에는 파괴 이후의 관습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역사에 부합하는 거짓 기억을 이식할 위험이 존재한다. 재건된 역사는 그것이 위조된 것일때도 과거의 진본 기록으로 읽힐 수 있다.(324쪽)”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이 여전히 당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을 정리한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세운 사람은 사라지고 없다 해도 죽은 건물은 사어(死語)처럼 슬픈 웅변이 될 수 있다. 파괴된 건물은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조각된 석조 칸막이와 목재 파편에 뒤섞여 포차 공동묘지에 묻힌 보스니아 무슬림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의 유산에서 발전한 공동의 세계유산이라는 관념은 물론이거니와 평등과 정의와 이성이라는 계몽주의의 가치와 객관적인 역에 대한 열망까지 위험에 처했다. 분쟁의 한복판에서 보호에 대한 약속이 헌신짝처럼 버려진 20세기의 역사가 21세기에 또다시 되풀이될지 아닐지는 다음 몇 년 안에 판가름이 날 것이다.(369쪽)”

저자가 핵심적으로 인용한 사례들은 주로 현재진행형인 것들이지만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문화청소행위에 대한 기록들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문화말살 정책을 저자에게 설명할 기회를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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