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평전 / 에즈라 보걸 지음 / 심규호와 유소영 옮김 / 민음사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제가 북경을 처음 방문했던 것은 9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만해도 ‘중국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구나’하는 정도였지, 불과 10년 뒤에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철의 장막에 숨겨진 나라 소련과 비교하여 죽의 장막에 숨겨진 나라라고 불리던 중국의 문을 열어 개방하고 국가의 체질을 개혁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핵심인물은 덩샤오핑이라고 합니다. 1904년 8월 22일 태어나 1997년 2월 27일 92세를 일기로 사망한 덩샤오핑의 삶과 정책적 과오를 담은 <덩샤오핑 평전>을 읽게 된 것도 남다른 인연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10년 전쯤이던가 택시를 타고 가는데 운전하시는 분께서 백미러로 저를 바라보더니 등소평을 닮았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가깝게 지내는 분께 이 이야기를 했다가 “전혀 아니거든요?”라고 핀잔을 들은 것처럼 당시에는 저 역시 “그런가요?”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덩샤오핑 평전>을 읽으면서 외모는 지인의 말대로 ‘아니올시다’인지 모르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비슷한 구석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0년 전 택시기사님께서 ‘저의 관상을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셨나보다’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덩샤오핑 평전>은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페어뱅크 센터와 아시아센터의 소장을 지내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동아시아문제 전문가 에즈라 보걸교수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이들은 “이 책은 덩샤오핑에 대한 단순한 평전이나 전기가 아니라 중국 전체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변혁기를 단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에 대한 기록이면서도 기존의 덩샤오핑 평전 또는 전기에 관한 저작물과 크게 다르다(1092쪽)”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어 번역판에 붙이는 서문에서 저자는 “중국의 변화는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변화의 본질을 한국인들이 이해하는 데 이 책이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적었습니다. 현재도 중국은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국가의 핵심국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그 속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등 모든 방면에서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중국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 붙어 있는 우리나라가, 특히 중국의 심장부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으로 맞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116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옮긴이들이 정리한 전체의 얼개를 미리 조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전체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덩샤오핑의 인생 경력,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험난한 여정, 덩샤오핑 시대 개막, 덩샤오핑 시대, 덩샤오핑 시대에의 도전, 덩샤오핑의 역사적 위치 등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덩샤오핑 주도하에 개혁 개방이 시작된 1978년 전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1092쪽)”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중국 공산당의 혁명 1세대를 이끌었던 마오쩌둥은 변덕이 심하고 누구도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마오쩌둥은 매력적이고 거시적 안목과 지혜를 갖춘 탁월한 전략가였기 때문에 재능 있는 군인 장제스와 대륙을 놓고 불리하게 시작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또한 영리하고 교활한 권모술수의 대가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마오쩌둥 같은 스타일의 지도자를 모시려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하는 고도의 생존기술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반대의견을 내놓는 것은 물론,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처럼 지나치게 엎드리는 것도 의심을 사서 몰락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다한 덩샤오핑도 세 차례나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나서 실각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지로 내몰리지 않고 결국은 돌아와 마오쩌둥 사후에 대권을 장악하는 뚝심을 보여 오뚝이를 의미하는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위기상황에서 분노하거나, 달아나거나, 포기함으로서 자멸의 길을 밟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덩샤오핑은 “노골적으로 분노나 불만을 드러내지 않으며, 감정에 따르기보다는 당과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조심스러운 분석에 따라 결정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43쪽)”시킨 결과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 역시 지금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오면서 편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여전히 제가 이 시대에 태어난 소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일이 무슨 일이 될 지는 저도 아직 가늠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현안에서 미래에 해야 할 일을 골라내는 눈은 여전히 밝은 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장제스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1949년에는 청나라 말기에 외국에 할양되었던 대부분의 영토를 되찾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소련의 도움으로 현대적인 공업건설에 착수하여 1956년에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 1966년 시작되어 마오쩌둥이 사망하던 1976년까지 이어졌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여 중국을 정체와 혼돈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요소가 공산당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소련의 수정주의가 중국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여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본가와 지주는 물론이고 지식인들까지도 모조리 제거되어 국가운영의 동력이 꺼질 위기에 봉착했던 것입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던 1967년부터 1973년까지 하방(下放)되어 있던 장시(江西)에서 지내는 동안 중국사회의 모든 체제에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다듬는 한편, 마오쩌둥에게 진심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이어간 끝에 문화혁명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을 정돈할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의 국정 운영에 관한 철학 가운데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덩샤오핑은 효과적인 국가 정부를 조직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법률이나 규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정 부처에 지도자를 배치하고 그들에게 실권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55쪽)” 즉 각급 기관장에게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함으로써 현안에 대한 의사결정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영토가 넓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의사결정체계를 운용하다보면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힐 수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사진 출처 : http://www.chinanews.com/tp/hd2011/2014/02-19/307865.shtml

마오쩌둥의 죽음에 임박해서 국정을 정돈하는 임무를 맡아 당지도부를 강화하고, 군대와 지역을 정돈하여 원활하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교육제도의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칭화대학을 둘러싸고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과 충돌을 빚으면서 다시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976년 4월 5일 텐안먼 광장에서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덩샤오핑을 지지하는 시위가 일어난 것이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자리를 차지한 화궈펑이 마오쩌둥 사후에 사인방을 체포하면서 덩샤오핑은 재기의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원로들의 요구에 따라 1977년 현업에 복귀하게 되는데, 이때 덩샤오핑의 나이는 일흔 두 살이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젊어졌습니다만, 원로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할 때입니다. 오랫동안 쌓인 경험이 정책결정의 바탕이 되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보수적인 방향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이 처음 착안한 것은 지식계층의 확대였다고 합니다. 낙후된 중국의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젊은 지식인들의 양성이 시급한 과제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과학 선진국, 특히 미국으로 젊은이들을 유학을 보내고, 국내에서는 출신성분에 따라 입학이 결정되던 관행을 무너뜨리고 대학입학시험을 부활시켰습니다. 1975년 덩샤오핑은 중국의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방문해서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전한 모습들이 중국과는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몰락해 있어야 할 서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본 덩샤오핑은 결국 국정의 방향을 개방으로 잡게 되는데, 덩샤오핑은 각급 지도자들의 외국방문을 추진하여 자연스럽게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베트남을 통하여 중국을 포위하려는 소련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하여 동남아국가 순방을 통하여 베트남을 견제하는 한편 단기간 베트남을 침공하여 경종을 울리는 강수를 두기도 합니다.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의 꽃은 1972년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빗장을 푼 이후로 미온적이던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를 발전시켜 1979년에는 공식 수교를 맺게 한 것입니다. 이는 소련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과 경제발전을 위한 다각적 포석이 어우러져 이룬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저자가 별도 항목으로 다루고 있는 덩샤오핑의 통치술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권위 있는 말과 행동을 근본으로 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정책이 반대에 부딪히게 되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여 이해를 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다시 추진하는 끈질긴 면모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또한 조직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단결을 강화하고 분열을 최소화했다고 합니다. 특히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쌓인 사회적 갈등 요인에 대하여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으로 묻어 두고 자신의 일에 전념하자’고 권고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쟁론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난제는 우리보다 총명하여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는 후세들이 해결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곤 했다.(521쪽)’고 하는데, 역시 연륜이 묻어나는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덩샤오핑의 성공적 조직관리 철학의 핵심은 '계파를 지양하고 능력을 갖춘 관리를 선발’한데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계파가 조직을 무너뜨리는 최악의 요건이 되곤 하는데, 안으로 굽게 되는 팔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었던 것도 덩샤오핑의 돋보이는 통치술입니다. 덩샤오핑의 통치업적 가운데 하나는 원로정치를 종식시킨 것입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권력을 쥐고 있었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나름대로 정한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 홀연히 차세대의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넘기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원로들 역시 자신과 동반하여 권력에서 물러나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덩샤오핑의 통치기간 중에 일어난 텐안먼 사건은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입니다. 후야오방이 사망한 1989년 4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를 ‘베이징의 봄’이라고 합니다. 주언라이에 대한 추모와 덩샤오핑의 복귀를 요구한 1976년 텐안먼 광장의 시위와 비슷하게 시작한 베이징의 봄은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이다가, 요구수준이 확대되고 시위내용도 과격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중국 정부가 6월 4일 군대를 동원하여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고서야 질서를 회복한 불행한 사건입니다. 덩샤오핑은 시위 초기부터 강력하게 대응하여 수습하기를 바랐지만 책임을 맡은 자오쯔양이 소극적 대처로 사태를 키운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덩샤오핑은 평생 무력진압이라는 카드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그는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서 그 여파가 중국에까지 미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으며, 강경진압만이 국가단결을 유지하고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텐안먼 사건 이후 20여년이 흘렀는데, 중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회와 기적 같은 성장을 누리게 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소규모 항의는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고, 중국 정부는 텐안먼 사건의 재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덩샤오핑은 1992년 정치무대에서 물러났습니다만, 지난 150년간 중국을 지배한 어떤 영도자도 이루지 못했던 사명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와 동료들은 중국 인민을 부유하게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덩샤오핑은 전환 과정에서 전면적인 영도력을 발휘한 총지배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898쪽)” 이제 중국은 아시아 문명의 중심에서 세계 속의 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의 후계자들은 사회보장의 확대, 환경보호, 부패 척결, 자유에 대한 한계설정, 그리고 통치의 합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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