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지도 / 제프리 K. 올릭 지음 / 강경미 옮김 / 김문조 감수 / 옥당 펴냄, 2013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비교적 짧은 기간에 가장 우월적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보취급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보취급능력의 출발은 기억입니다. 인간이 오감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고, 필요한 상황에서 기억된 정보를 끄집어내 비교분석하고 종합하여 행동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별로 획득한 기억은 언어를 통하여 집단 내에서 공유가 가능했습니다. 집단 내에서 공유하는 기억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뿐 아니라 집단의 정체성에 관한 정보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화나 전설이라고 하는 구전문학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서양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호머가 살았던 기원전 800년경에는 그리스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구술로 전해지던 공연이 문자가 발명된 후세에 이르러 채록되어 남겨진 것입니다.

대체로 뛰어난 기억력을 소유한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정기적으로 집단 구성원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피터 메칼리스터는 <남성퇴화보고서>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 서사시의 구비전승을 지켜온 구슬라르(Guslar)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구술라르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싸웠던 슬라브 족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인들인데, 이 전통이 20세기까지 이어져왔다고 합니다. 최후의 구슬라르 가운데 아비도 메데도빅이라는 문맹의 도축업자는 놀랍게도 58개의 서사시를 외우고 있었는데, 한 개의 서사시는 모두 7만 8,555행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자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개인별로 축적되던 정보는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두뇌 밖의 장소에 정보보관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기억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보의 왜곡 가능성을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정보의 왜곡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겠습니다만, 정보 이용자가 상호 교차확인 등을 통하여 정보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오기도 했습니다.

점토판에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 새로운 정보보관법은 양피지, 종이 등에 인간의 손으로 기록하던 방식으로부터 목판, 석판을 사용하는 수동식 인쇄법을 거쳐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대량 자동인쇄가 가능해지면서 정보의 폭발적 확산이 가능해졌습니다. 현대에 들어 개발된 전자장비를 이용하면서 문서뿐 아니라 그림 심지어는 동영상까지도 보관과 유통이 손쉬워지면서 정보유통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몫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오감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기억하고 기억된 정보를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밝혀내야 할 과제가 많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시작부터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제프리 K 올릭의 <기억의 지도>는 제목과는 달리 생물종의 하나로서 인간의 기억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집단의 기억에 관하여 적고 있습니다. ‘집단기억’이라는 용어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에밀 뒤르켕의 문하생 모리스 알브바슈의 1925년도 저작 <기억의 사회적 구성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기억의 지도>를 감수하신 김문조교수님은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식적 가교로써 ‘삶에 보탬이 되는 지혜나 교훈의 교훈’이라는 온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의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려는 집합적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역사학·사회학과 교수로 기억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제프리 K. 올릭 교수의 <기억의 지도>를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 우경화의 정도가 심각해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가늠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의 일원으로 주변국가에 엄청난 상처를 안긴 일본은 종국에는 전쟁을 지속할 힘을 잃고 패전이 임박한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이라고 하는 초유의 전쟁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면서 입은 끔찍한 피해로 인하여 유럽의 주축국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전후 처리절차와는 다소 차별화된 과정을 밟았던 것 같습니다. 일본은 전쟁의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피해자라는 허울 뒤에 숨어 전쟁의 책임을 희석시켜온 경향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회생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국제적 지위에 걸맞게 전쟁의 아픈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나 전쟁배상에 관한 문제 등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질 일은 없다고 딱 잡아떼고 있을 뿐 아니라 전범들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신사에 정부각료들이 참배하여 주변국가를 자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피해를 입은 당사국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각료나 천황이 구체적인 잘못을 인정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수사적인, 아니 말장난에 불과한 인사치레로 가름하곤 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반면 1970년 12월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바르샤바 협상을 위하여 서독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폴란드를 공식 방문한 빌리 브란트 수상은 바르샤바 게토에 봉헌된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신문은 “그리고 그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그가, 무릎을 꿇어야 하지만 꿇지 않았던 사람들, 감히 무릎을 꿇을 용기가 없어서, 무릎을 꿇을 수 없어서, 무릎을 꿇을 용기를 낼 수 없던 사람들을 대신해서.(172쪽)”라고 전했습니다. 브란트 수상은 이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합니다.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빌라노프궁을 출발하면서 게토 기념비의 특별한 의미를 표현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독일역사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살해된 수백만 희생자에 책임감을 느끼며 나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모든 인간이 할 만한 행동을 했다.(172쪽)” 지금까지의 돌아가는 꼴을 보면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 앞에서 무릎을 꿇을 용기를 가진 일본 당국자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를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수상

올릭 교수는 바로 2차 세계 대전에 책임과 관련하여 전후 독일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의 지도>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리뷰를 읽다보면 ‘역사는 집단기억에서 비롯되어 후회의 정치를 통해 진화한다’라는 작은 제목을 만나게 됩니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 제3제국이 인류사에 기록될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 기전으로 작용하게 되는 ‘집단기억’이라는 기전과 종전 후에 독일이 밟아온 전쟁책임의 청산과정을 ‘후회의 정치’라는 개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dis 아스만(1992)이 사회적․개인적 기억과는 별도로 문화적 기억이라 부른 것이 바로 집단표상으로서의 집단기억이다. 뒤르켕을 계승한 알브바슈의 이론에서 기억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집단을 결속하는 활동만도 아니다. 기억은 적극적으로 유지되든 아니든 한 집단이 간직한 문화적 유산이다.(19쪽)”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리처드 도킨스 교수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제안한 ‘문화를 전달하고 모방하는 복제단위’ 밈(meme)이라는 개념이 바로 집단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 담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85-86년 독일에서 일었던 역사가논쟁(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논쟁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정당방위로 해석한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의 글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를 다룬 역사학자 찰스 마이어의 책을 비평한 글을 읽으면서라고 합니다. 이후 꾸준하게 발표한 글들을 묶은 <기억의 지도>는 1부; ‘집단기억,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능동적 과거’와 2부; ‘후회의 정치, 과거의 잘못을 대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각각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집단기억의 개념을 탐구하고 집단기억과 개인기억의 관계를 정리하였습니다. 2장과 3장에서는 독일의 사례를 경험적으로 분석하였는데, 2장에서는 독일 나치과거 이미지의 지속과 변형이 이미지들의 도덕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즉, 집단적 기억행위는 본질적으로 도덕명령이라는 차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3장에서는 ‘기억의 기억’이라고 부르는 되풀이 되는 기념이라고 하는 현상이 단순히 일회적 관계의 반복이 아니라 발화와 응답의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4장에서는 언어와 행위에 대한 바흐친의 대화주의적 접근방식을 통하여 기억이란 하나의 사물도, 단순한 수단도 아닌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는 매개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부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글에서 ‘고통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며 어떤 사회든 동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 헤나 아렌트의 성찰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5부에서는 정치적 정당화의 새로운 원칙으로서 후회의 정치가 무엇인지 개념을 정의하였습니다. 6장에서는 니체와 베버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책임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데, 트라우마(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와 배상, 치유 보상에 대한 담론을 다루었습니다. 6장에서는 독일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를 들어 승리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어떻게 화해를 이루어갈 것인가를 논하였습니다. 둘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에 대하여 저자는 ‘신념의 문제’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희생자와 가해자가 이미 없는 마당에 그들의 자손들 사이의 이해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베버의 시각으로 보아 책임윤리에 해당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7장에서 저자는 후회라는 주제를 트라우마와 르상티망(미움, 원한, 분노 정도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신정론에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는 집단기억과 만성적 시간분화의 관계를 조망하고 있는데, 바흐친의 ‘장대한 시간’이라는 개념 속에서 사회학의 시학과 역사를 중심에 두고 그와 관련된 보상의 형태를 조명하면서 근대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전후 패전국 독일과 일본에 대한 후속처리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1950년을 전후하여 독일은 나치로 인하여 비롯된 수많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쟁터였던 독일은 물질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을 뿐 아니라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연합국은 독일인들에게 그들이 지지했던 전쟁범죄를 직시하도록, 점령 초기에 집단수용소를 견학하도록 강제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당시 성인이었던 모든 독일인들에게 과거의 행적을 묻고, 그 설문을 토대로 나치협력자를 가려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종국에는 일부 독일인의 반발을 부르기도 했는데, 대표적 사례가 앞서 말씀드린 역사학논쟁이었던 것입니다.

극단적 보수주의자 에른스트 놀테는 1987년 독일의 유력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실린 글에서 ‘홀로코스트의 대명사가 된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가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부터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악보다 더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홀로코스트라고 하는 유례없는 짐의 무게를 덜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논쟁의 반대편에 섰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릇된 비교역사서술을 활용해 집단책임을 피하려는 신보수주의의 음모라고 반박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우경화바람과 비슷한 모습 아닌가요? 독일의 경우 이런 우경화움직임에 제동을 건 지식인들이 건재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각에서는 우경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후 독일은 일관되게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 과정을 1949년 서독의 창립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신뢰할만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외부에 보이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1966-69년 사민당이 대연정에 참여할 때부터 74년 브란트 수상의 사민당-자민당 연정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도덕국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던 시기, 그리고 1975년 이후 헬무트 슈미트 수상이 집권하면서 내세운 ‘정상국가’의 이미지를 표방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건너오면서 전쟁의 책임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던 독일 국민과 독일정부의 진심은 결국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의 신뢰를 얻기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이웃과 언제까지 등 돌리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오랜 세월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잔꾀만 부려온 이웃에게 우리는 어떤 자세를 보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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