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김상기 편집국 부국장]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PNH)이란 희귀질환이 있다. 국내에 이 질환을 앓는 환자는 250여명 정도이다. 듣기에 생소한 이 질병은 참 고약하다. PNH이 발병하면 면역체계 이상으로 적혈구가 손상돼 비정상적인 용혈(溶血) 현상을 일으킨다. 이 질환을 앓는 환자는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뇨를 보이고 혈전증과 만성 신질환, 복통, 극심한 피로 등의 증상으로 고통을 겪는다. 이러다보니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누리기 힘들고, 삶의 질은 열악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효과가 좋은 치료제가 있다는 점이다. '솔리리스주'라는 약이다. 문제는 약값이 너무 비싸다. 오죽하면 이 약이 '세계 최고가약'으로 불린다. 얼마나 비싼가 하면 딱 소주한잔 용량인 30ml 병당 736만원(올 4월1일자로 669만원으로 인하)으로, PNH 환자가 연간 부담해야 하는 약값만 5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지난 2012년 10월부터 이 치료제가 건강보험에 등재돼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약값이 워낙 고가인만큼 급여기준이 까다롭고 절차도 복잡하다.  PNH 환자가 병원에 가더라도 의사가 판단해 이 치료제를 처방할 수 없다. 먼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 환자의 상태가 급여기준을 충족할 때 비로소 약 처방을 하고 건강보험 급예 혜택을 받게 된다. 급여 적용시 환자는 약값의 10%만 본인이 부담하면 된다. 

지금까지 솔리리스주 사전승인을 받은 PNH 환자가 많지 않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혈액내과 전공자 등 임상전문가 8명으로 구성된 사전심의위원회를 통해 병원에서 신청한 사전승인을 검토해 승인, 또는 불승인을 결정한다. 심평원의 사전승인 검토 결과를 살펴보니 약 절반 정도는 불승인 결정이 났다.

심평원이 공개한 불승인 이유는 20~30자 내외로 아주 짧았다. 주로 PNH 환자에게 나타난 급성신부전과 폐부전 등의 합병증이 과연 이 질환으로 인한 것인지 입증하기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PNH 환자에게 혈전증과 급성신부전, 폐부전 등의 합병증이 흔하게 발생한다는 연구자료가 많다. 그렇지만 '이 질환으로 인한 것인지 입증하기 곤란하다'는 짧은 문장으로 끝이다. 불승인 결정을 받은 환자들은 재심의를 요청할 수도 없다. PNH 환자들은 "그 짧은 한줄로 환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지 심평원에 되묻고 싶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다.

외국은 어떨까. 호주에서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급여기준이 있다. 다른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급여기준에 명시된 조건을 대부분 충족해야 하지만 호주는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 걸까. 기본적으로 의료보장제도의 운영 기준과 그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호주를 비롯한 선진국이 의료보장의 목표를 질병의 치료와 예방에 두고 있다면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는 오로지 보험재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건강보험 재정이란 게 국민들이 내는 건강보험료 수입으로 충당하고, 그 재원으로 수많은 가입자들에게 급여 혜택을 제공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한정된 의료자원의 공정한 분배라는 의료윤리 문제도 끼어든다. 소수의 희귀질환자 치료를 위해 많은 건강보험 재정과 의료자원을 지출할 것이냐, 혹은 더 많은 환자들을 위한 건강보험 급여 혜택에 무게를 둘 것이냐 하는 문제다. 지금까지 건강보험 재정을 비롯한 의료자원의 분배는 건강보험제도 관리와 정책적 판단에 따라 이뤄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국민건강보험법 제1조(목적)의 질병 예방과 건강증진에 대해서도 보험급여를 실시함으써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목표까지는 요원하다.

이런 상황에서 심평원과 건강보험공단이 하는 일을 납득하기 힘들다. 환자들이 병원에 낸 진료비 가운데 비급여를 제대로 지불했는지 확인해 볼 것을 권한다. 심평원은 이를 위해 '진료비 확인제도'를 운영한다. 건보공단은 진료비 확인 이벤트까지 한다. 심평원은 이런 제도를 통해 해마다 병원이 환자에게 부당하게 징수한 진료비 수십억원을 돌려주고 있다고 홍보한다. 환불 결정된 내용을 보면 건강보험 급여 대상을 병원이 임의비급여로 처리한 사례가 많다. 이 중에는 병원의 도덕적 해이로 인한 불법 임의비급여도 있지만 의사가 환자에게 최선을 진료를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의학적 임의비급여도 있다. 급여기준 초과나 허가사항 초과, 심사 삭감을 우려한 임의비급여 중에는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건강보험 급여기준이 까다롭고, 심사기준이 불투명하다보니 때때로 임상현장에서 의료진이 환자의 상태가 더 나빠질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적지 않다. 일부 의사는 삭감이나 불법의 멍에를 각오하고 환자를 위해 임의비급여를 선택한다. 근본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낮은 건강보험 보장성과 불합리한 급여기준 탓이다. 건강보험의 급여 범위는 네거티브 리스트를 취하면서 대부분의 의료서비스를 국민건강보험 급여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작 심평원이 심사할 때는 포지티브 방식이 적용돼 급여기준에 열거된 것 외에는 대부분 급여 혜택이 제한된다. 상당히 심각한 모순이다. 이처럼 모순된 구조를 방치하고, 비급여로 인한 의료비 부담을 의사와 병원 탓으로 돌린다. 국가가 책임지지 못해 발생한 비급여 영역을 환자들한테 감시하라고 부추긴다. 건강보험제도의 치명적 문제점을 제도 운영기관 스스로 알리고 입증하는 셈이다. 건보공단과 심평원이 해야 할 일은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위한 노력과 합리적 급여기준을 만드는 거다. 근본 원인은 외면하고 환자에게 병원이 진료비를 제대로 징수했는지 감시하라고 부추기는 건 직무 유기다. 무엇보다 그런 일을 마치 국민의 권익보호를 위한 것처럼 홍보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알려드립니다

PNH 환자가 건강보험 급여혜택을 받을 경우 환자가 약값의 10%를 본인부담하고, 여기에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상한제 적용과 한국혈액암협회가 운영하는 PNH 약제비지원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경우 환자가 실제로 부담하는 1년치 약값 부담은 최고 300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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