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수(의료기기산업혁신연구회 산업이사)

[라포르시안] 미국 정부는 2021년 2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행정명령을 발동해 자국 주요 자원에 대한 공급망 교란 요인을 분석하고 대안 마련을 강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상무·에너지·국방·보건부는 100일 이내 긴급성에 따른 품목 결정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또 농무·교통·국방장관에게는 1년 이내 보고서 제출을 지시해 부처별 중요하거나 필수적인 자원에 대한 안정된 공급망 구축을 명령했다.

이 같은 행정명령은 표면적으로 공급망에 대한 안정적 유지가 목적으로 보이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최근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자국 산업 보호와 지역별 정세 변화에 따른 미국의 근본적인 대외정책 변화로 읽혀진다. 행정명령 일부를 살펴보면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그동안 국경 없는 유통경로를 모두 흔들어 버리고 세계 각지에 있던 공급망뿐 아니라 자국 내 공장 이전까지 강제하고 있는 만큼 한국과 같은 수출 중심 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시간을 되돌리면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양자구도는 소련의 몰락으로 붕괴된다. 이후 세계 경찰을 자처했던 미국은 전 세계 요지에 군대를 파병해 무역로를 지켜왔고, 이를 기반으로 비교우위에 기반한 안정적인 무역 호황을 누렸다. 냉전 과정에서 미국의 목적은 소련에 대항할 우방국 확대에 있었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적이 없어진 미국은 파병과 경찰 역할이 더 이상 의미를 잃게 되고, 연이은 국지전 규모의 개입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보는 중국에 노골적 견제를 취하기 시작했고, 지역별 협력국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는 국가는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자원과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지만 미국은 과감하게 국제적 비교우위를 부정한 채 자국 기업 및 중점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책을 펼치고 강제적 생산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우리나라와 일본 간 갈등이 빚어질 때 불화수소가 문제 됐듯이 미국과 인도 사이에는 의약품에 사용되는 미국산 필터가 문제 된 적이 있다. 두 제품 모두 복잡한 생산 과정 중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고도화된 시설에서 이 같은 단 하나의 변화나 공급 중단이 공장 자체를 중지시키는 원인이 된다.

미국은 앞서 행정명령을 통해 필수 또는 중요 의약품에 대한 자국 내 생산을 강제화하고 유통망 투명화와 함께 G7 국가와의 협력을 강조했다. 당연히 기존에 미국에 수출했던 공급 업체는 이 같은 규정 때문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행정명령에 대한 하위 규정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영향과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우리 정부와 기업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더 큰 문제는 품목 확대 가능성이다. 미국이 단지 필수품목에 국한하지 않고 그 범위를 점차 늘려나갈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 의료기기업체가 준비해야 할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새로운 보호주의 무역의 특징은 철저히 무역수지에 따라 움직일 것이고 중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 특정 원산지 제제를 예상해야 한다. 유통경로의  투명화란 결국 모든 원재료에 대한 이력을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모든 의료기기 원자재와 부품에 대한 파악을 통해 국가별 수입망에 대한 대비와 함께 거래처 다변화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직 우리나라 의료기기가 널리 팔리지 못하는 남방·서남아·동유럽 등이 그 대상이고 이에 대한 교역 기회 또한 늘릴 필요가 있다.

영국이 브렉시트로 고립화되고 독일 또한 유럽연합에 대한 부담으로 경제적 여력이 약해졌다. 이처럼 전통적 강대국들의 상황이 급변한 현실에서 미국의 독자적인 전략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을 피하고 미국 전략에 역행하지 않는 대안 마련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국 의료기기시장을 포기하지 않는 전략 수립이 요구된다. 국내 의료기기업체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변화가 힘들 뿐이다. 물론 고환율과 새로운 국제정세 변화로 인한 숙제가 이전보다 풀기 쉽지 않지만 미국과의 우호 역량을 감안하면 위기가 아닌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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