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석(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혁신산업위원회 부위원장)

[라포르시안] 의료기술은 생명과학·정보통신기술에 힘입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정밀의료·디지털 치료제·웨어러블 의료기기 등 새로운 형태의 의료기기가 등장하면서 의료의 진화는 환자 건강보장 확대와 보건산업 발전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최근 기사에 따르면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내년을 기점으로 적자 전환되며 6년 뒤인 2028년에는 적립금이 바닥난다고 한다. 더구나 인구의 20% 이상이 65세가 넘는 초고령 사회 진입이 2025년이 될 수도 있으니 의료비용 증가는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보건산업을 빠르게 발전시켜나갈 지와 제한된 건강보험 재정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여부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는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새롭게 등장한 의료기기가 다른 국가에서는 어떻게 가치평가가 이뤄지고 건강보험을 적용받고 있을까.

국가별 가치보상 방법을 살펴보면 프랑스는 건강보험제도의 입원진료에 포괄수가제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고가 의약품 및 의료기기는 ‘LPPR’(List of Reimbursable Product and Service)이라는 수가 목록에 의해서 별도로 보상된다. LPPR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유사하게 임상적 유효성에 근거한 기술적 심사를 프랑스 복지부 산하에 구성된 의료기기 의료기술평가위원회(CNEDiMTS)에서 평가한다. 이후 의료경제평가위원회(CEPS)는 해당 제조업체와 협상을 통해 가격을 결정하게 되며, 추가 보상이 필요할 경우 세부적인 논의를 진행한다. 특히 추가 보상은 임상적 가치 개선 정도에 따라 ▲1등급 매우 중요 ▲2등급 중요 ▲3등급 중간 ▲4등급 미약 ▲5등급 개선사항 없음과 같은 5개 기준을 각각 적용해 가격에 반영한다. 

독일 또한 포괄수가제를 기반으로 입원환자를 관리하며, 외래환자는 총액예산 내에서 행위별 수가를 적용한다. 포괄수가제에 포함된 의료기기는 개별로 보상받지는 못하지만 신의료기술에 대해서는 InEK(병원비용보상체계연구소)를 통해 개별 병원 단위로 NUB(New Methods for Treatment and Screening) 목록에 신청을 한다. NUB 목록은 포괄수가제에서 코드를 부여받지 못한 새롭고 혁신적인 진단·치료에 대해 추가로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기전이다. InEK는 신청제품이 혁신적이고 새로운 제품인지와 적정한 비용인지에 대한 검토를 진행한다. 특히 2b등급 또는 3등급 이상 의료기기로 분류되는 경우 연방공동위원회(G-BA)의 의료기술평가를 통해 충분한 임상적 근거를 검증받는다.  

이밖에 영국은 NHS(National Health Service·국가보건의료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PbR(Payment by Results·지불성과제) 시스템을 도입했고, PbR에서의 금액은 DRG 개념과 유사한 의료자원군(Healthcare Resource Groups·HRG)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소모된 의료자원은 제공된 의료서비스에 포함되기 때문에 영국에서도 의료기기는 개별로 보상하지 않고 가격도 정부에 의해 직접 규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료서비스에 포함된 의료기기(HRG군)는 NHS 처방서비스(Prescription Services)에서 제공하는 ‘Drug Tariff Part IX’에 등록해야 하지만 HRG에 포함되지 않은 일부 의료기기는 별도 협상을 통해 병원 또는 단체가 구매를 진행해야한다. 신의료기술을 평가하는 NICE(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are Excellence·국립보건임상연구원)는 또한 목록에 등록되지 않은 의료기기 또는 의료기술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이들은 보건의료기술평가(HTA) 과정을 통해 평가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처럼 유럽은 새로운 치료의 신속한 접근을 촉진하고자 임상적 근거에 기반해 의료기술의 안전성· 유효성·경제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기전을 마련해 별도 보상을 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의료기기가 가치를 보상받고 건강보험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결국 치료결과가 좋아지거나 비용효과성을 입증하는 과정이 필수불가결하다. 가격이 저렴하고 성능이 좋은 제품을 기대하지만 실상은 성능이 좋아진 만큼 가격도 올라가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가치를 평가하고 건강보험을 적용한다. 즉 의료기기가 가치를 보상받고 건강보험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높아진 제품의 가격만큼 환자의 건강 결과를 얼마나 향상시켰는지를 설명하는지가 중요한 셈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의료기기의 가치를 입증하고 건강보험 제도권에 진입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 이후에도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신의료기술 평가를 통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해야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거치며 급여 적정성의 벽을 넘어야 비로소 건강보험 요양급여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서 환자의 건강 결과 측면에서의 긍정적인 변화를 증명해야 한다.

때문에 가치를 증명해 내지 못한 의료기기는 시장 진입이 어려우며, 설령 진입한다 해도 건강보험 대상이 되지 못하면 시장에서의 제품 확산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간 정부는 주로 의료기기의 연구개발·인허가·해외수출에 많은 지원을 해왔다. 하지만 많은 의료기기가 시장 진입에 실패해 사장되거나 기대한 만큼의 성적을 얻지 못했다. 이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고민해 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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