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훈(의료기기산업혁신연구회 기획이사)

[라포르시안] 일상의 모든 것들을 바꿔 놓은 코로나19가 변이 바이러스로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지난 2년간의 학습효과로 이전과 같은 대혼란은 겪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국내 의료기기산업은 코로나 기간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고 기술 발전도 이뤄졌지만 그 이면에는 각종 인허가 및 사후관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인허가 순위는 감염병 관련 제품에 초점이 맞춰졌고, 해외 출장도 나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GMP 또한 올해 12월까지 현지실사에서 서류심사로 대체됐다.

특히 의료기기업계는 감염병 여파로 인한 신규 인허가 지연 등 적체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상황을 감안해 모든 불편을 묵묵히 감내했다. 일상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업계와의 소통을 재개했으며, 업계 또한 그간 묵혀왔던 각종 민원 불편에 대한 제도개선 목소리를 낼 준비를 마쳤다. 가장 큰 문제는 인증 또는 허가·심사기관이 같은 업무를 중복 수행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2등급 특정 제품 인증을 가정한다면 일단 기술문서심사기관에 기술문서 검토 신청을 해 심사를 받고 승인 받은 심사결과통지서를 첨부해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에 인증 신청을 한다. 그러나 인증신청단계에서 승인받은 심사결과통지서를 다시 심사해 변경 내지 보완을 지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 3·4등급 허가의 경우 식약처 첨단제품허가담당관실에 허가심사(기술문서심사) 신청을 하면 의료기기심사부로 이관이 되고 의료기기심사부에서 심사 후 승인받은 기술문서를 첨부해 첨단제품허가담당관실에 허가신청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첨단제품허가담당관실에서 다시 심사를 해 의료기기심사부의 심사결과 내용의 변경 내지 보완을 지시해 다시 의료기기심사부로 변경 제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물론 행정절차만 놓고 봤을 때 각 단계마다 이해되는 면도 있지만 복잡한 인증 및 비효율적인 허가절차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안전에 대한 반복적 검토 때문이라고 하지만 국가 행정력에 대한 효율적 배분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

우리나라 의료기기가 아시아의 본보기가 돼 많은 외국 신제품들이 한국에서 인허가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한국이 갖고 있는 시장의 역동성과 함께 안전에 대한 참조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AHWP(아시아의료기기규제조화회의)·IMDRF(국제의료기기규제당국자포럼) 의장국을 역임한 나라가 갖는 국제사회 위상은 우리가 세계 10위권 의료기기 국가 지위를 갖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어느덧 우리나라 제도는 무거워지고 절차는 복잡해졌다. 이제는 양보다 질적으로 변화해야 할 자기성장의 시점이 도래했다. 특히 같은 서류를 중복해서 봐야하는 비효율성이 갖는 정당성은 개선돼야 할 과제다. 특히 GMP 인증 적체 또한 많은 선량한 민원인을 불법적인 위반자로 내몰고 있다. 비록 실질적인 처분이 따르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적체가 일상화되는 현실은 하루빨리 개선돼야한다.

현재 GMP 인증을 위한 신청은 90일 이전으로 규정돼 있다. 따라서 만료 전 인증이 완료돼야하는 제도적 약속이 엄연히 존재했지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인증 건수는 인증기관과 지방청의 한계를 넘어 서고 있다. 만료가 임박한 회사가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 시일을 앞당기려는 노력은 현행 규정을 준수하려는 의지 때문이다. GMP 만료에 따른 불이익은 단순히 처분 문제가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 제조사와의 관계와 입찰 등에 제출하는 각종 서류 등 사업상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한다.

민원인 입장에서는 열심히 준비해 접수했지만 단순히 인증기관 혹은 지방청의 업무적체로 법정 기한 내 결과를 받지 못한다면 억울할 수밖에 없다. 최근 발표된 감사원 감사 결과는 오히려 적체를 가중시키는 제도개선을 주문했다. 품목은 늘어나고 요건은 강화된 만큼 일견 이유는 있지만 문제는 감당할 수 있는 인증심사 수준을 넘어 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의료기기업계는 허가 복잡성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해결책을 찾고 있다. 가장 유력한 방안은 중복심사를 하고 있는 기관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의료기기는 안전성·유효성에 대한 과학이다. 모든 요건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방법과 제도를 갖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일치여부를 판정하는 절차인 셈이다.

단순히 중복심사로 단계가 많아지고 절차가 복잡해진다고 더 안전한 결과가 나온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중복되는 검토와 절차는 비용 상승과 함께 민원인 입장에서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통한 자료를 구비해야 하고, 이 때문에 결국 제품 가격과 신제품 출시 지연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늘릴 뿐이다. 이미 많은 회사들이 경제적 이유로 돈이 안 되는 의료기기를 포기하고 있다. 이는 환자와 의사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동시에 제품 수급 불안 시 대체 의료기기에 대한 범위를 축소시킨다.

GMP 또한 마찬가지다. 얼마 전 있었던 지방청의 적체가 본청 개입으로 해소됐지만 인증기관의 GMP 적체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이 확인됐다. 일부 의료기기업체는 이러한 현실 때문에 미리 1년 전 신청을 준비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을 늘린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의료기기업계는 관련해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지만 결국 행정력에 대한 집중과 선택 그리고 사후관리 강화만이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업계가 요구하고 있는 수요에 대한 제도 전반의 조정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적체를 막을 수 없다.

정부가 세계 10대 의료기기 국가에서 7대 강국 진입을 위해 다양한 노력과 지원을 펼치고 있지만 정작 규제산업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전성 확보와 이를 통한 신뢰다. 지금의 규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감당할 수 있는 제도적 균형점을 찾아야한다. 이제라도 중복심사로 분산돼있는 인허가 심사 제도를 단축하고 적체된 GMP 해소를 위한 선택과 집중이 규제 개선의 중심점이 돼야할 것이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