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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화의 Book소리] 숭례문 복구? “복원은 건물에 가해지는 가장 완전한 파괴”건축의 일곱 등불 / 존 러스킨 지음 / 현미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펴냄, 2012년

2008년 2월 10일 우리나라 국보 1호 남대문이 시커먼 연기를 토하면서 무너져 내린 것도 충격이었지만, 최근 복원이 끝난 뒤에도 목재의 건조과정이나 단청작업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새로운 충격을 던지고 있습니다. 남대문의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복원된 남대문을 국보 1호로 남겨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의 유현준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하여 “건축은 도자기나 그림과는 다르다. 건축은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료가 교체되고 복원되고 사용되면서 보존되는 것이 옳다. 남대문은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만든 생각을 기념하기 위해서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라고 설명하여 복원된 남대문이 국보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매일경제신문 2013년 11월 21일자 기사, “[I ♥ 건축] 남대문과 루브르”)

이희봉 교수의 <한국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고건축물에 담긴 의미를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하는 법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희봉 교수의 설명을 읽어 가면 죽서루가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건축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남대문 역시 당대의 자연경관에 잘 어울리고, 풍수적 의미를 담아 세워졌을 것인데, 이번에 복원된 남대문이 그런 배경을 잘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존 러스킨의 <건축의 일곱 등불>을 발견했는지는 잊었습니다만, 러스킨이 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일곱 가지 법칙 가운데 ‘기억’을 꼽았다는 것이 특이하다는 생각에서 읽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예술의 시초에 해당하는 그 법칙들은 진정 온갖 종류의 오류를 피하게 해줄 뿐 아니라 어떤 목표를 좇건 성공의 원천이 되어줄 것이기에, 이를 건축의 등불이라 칭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 불빛의 진정한 본성과 고귀함을 확인하고자 그 빛을 왜곡하고 제압하는 수도 없이 많은 장애물들을 일일이 따져보지 않은 일을 나태함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15~16쪽)”고 하였습니다. 각주에 따르면 ‘등불’이라는 단어는 잠언 6장 23절 “그 법은 빛이다.”와 시편 119장 105절 “그 말씀은 내 발밑을 밝히는 등불이다.”라는 구절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 2. 8. ~ 1900. 1. 20.)은 영국의 사상가로서, 젊은 시절에는 주로 예술분야의 비평에 집중하다가 1860년경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한 글을 써내 사회사상가로 명망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옮긴 현미정님은 “건축의 미학적 개념과 사례를 말하고 있지만 그의 도덕관, 종교관, 경제관을 바탕으로 종합적 사고로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건축 자체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을 유도한다(299쪽)”고 평하고 있습니다. <건축의 일곱 등불>은 러스킨이 약관 30살에 저술한 책으로 1849년 초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이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7쪽)” 일종의 재개발사업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을 무너뜨린 자리에 의미 없는 건축물을 세우는 현실에 분통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번역자는 “건축가들조차도 건축을 ‘디자인’만으로 이해하거나 단순한 생계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고, 건설이라는 경제 행위는 기업이윤의 증대 또는 부동산의 소유나 투자로 이해될 뿐이며, 정치공동체를 꾸려나가야 할 정치인들에겐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300쪽)”라고 하고 이런 현상은 이미 러스킨의 시대에 시작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예술로서의 건축의 의미를 중요시하던 러스킨으로서는 참을 수 없었기에, 집필하고 있던 <근대 화가론>을 중단하고 6개월 만에 이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영혼과 신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기술과 상상의 요소를 결합하는 것은 건축에 있어 본질적인 것(14쪽)”이라는 생각을 가진 러스킨다운 일이고,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러스킨은 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일곱 가지 법칙으로 희생, 진실, 힘, 아름다움, 생명, 기억, 그리고 복종을 꼽았습니다. 1장 ‘희생의 등불’의 1절에서 건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건축은 인간이 세운 구조체를 배열하고 장식하는 예술로서, 사용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21쪽)” 러스킨이 희생을 첫 번째 덕목으로 꼽은 것은  참된 건축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것, 추모하는 것, 시민적인 것, 군사적인 것 그리고 가정적인 것의 다섯 가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특히, 희생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건축에 들어가는 재화나 노동의 양보다는 건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성심을 다하는 희생이 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각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등불에서는 오늘날 날림공사라고 부르는 건축적 사기를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으로 부족한 것은 용인될 것이며 철저한 합목적성은 존경을 받을 것이나, 조악한 속임수는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을 것(51쪽)”이라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은 진정한 건축의 색은 자연석의 색이며 다양한 자연의 색으로 얻지 못할 조화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은 건축의 가치는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질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인간의 힘을 각인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연물의 이미지를 품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힘과 아름다움이 제대로 표현되어야 좋은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을 나타내는 요소로는 단순한 최종 윤곽선으로 표현되는 웅장한 크기나 꼭대기로 향하는 돌출 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요소로는 위로 올라가면서 생기는 다양한 비례, 수평분할의 대칭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생명이라는 요소의 의미를 다음 구절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어떤 대상이 죽은 사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잊고 있지 않음에도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고 즐거움을 상승시키는 경우가 많다. 아니, 오히려 상상력 자체의 지나친 생명력으로 열광한다. 구름에 표정을 주고, 파도에 행복을, 바위에 목소리를 집어넣을 때다.(198쪽)”

역시 제가 짐작했던 대로 이 책의 결론부분에 해당되는 ‘기억’이라는 주제에서 강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자는 쥐라산맥에 있는 샹파뇰르 마을 근처 앵강을 둘러싸고 퍼져 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해가 질 무렵을 자신의 삶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적었습니다. 이처럼 건축은 기억의 요체이자 수호자로 진지하게 생각되어야 할 것이므로 ‘오늘날의 건축이 역사가 되도록 하는 것’과 ‘지나간 시대의 건축을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서 보존하는 것’이라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전통건축을 귀중한 유산으로 보존하려는 의무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건축의 일곱 등불>을 읽으면서 가장 큰 울림을 느꼈던 부분입니다. 조금 길다 싶습니다만, “실제로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그 증인이 인간을 마주할 때,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사물과 조용히 대비를 이룰 때 영광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며 왕조의 탄생과 쇠퇴가 반복되고 지구의 표면과 해안의 경계가 바뀔지라도, 거기에 있는 돌은 그 고된 시간 동안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며 잊힌 시대와 다가올 시대를 서로 연결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래서 이미 그 민족 정체성의 절반을 구현하는 힘의 크기 안에 그 영광이 있다.(240~241쪽)” 건축물이 유구한 세월의 흔적으로 마모되기도 하고, 낙엽이나 심지어는 이끼가 덮여 자연과 동화되어가는 모습에서 존재의 의미가 빛을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의 법칙이야말로 건축의 법칙 가운데 으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때 우리는 역사적 건축물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런 건축물이 있다는 사실 조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억해주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건축의 보존이라는 문제와 기억이라는 문제가 상충하는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앞서 남대문 복원에 대한 유현준 교수의 생각을 소개해드렸습니다만, 러스킨은 건축의 복원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있어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내가 앞 장에서 생명의 전부라고 주장했던 그것, 오직 장인의 손과 눈으로만 주어지는 그 정신을 결코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 다른 시간대는 다른 정신을 만들고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건물이다.(249쪽)” 그리고 보면 근세 이후 소실되었다가 복원한 건축이라는 이유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한 문화재가 수두룩한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복원된 남대문이 국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무너뜨린 서울성곽을 복원한다고 합니다. 무너뜨린 성곽에서 나온 돌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새로 깍은 돌로 쌓아올릴 수밖에 없을 터인데, 새로 쌓은 성곽에서는 옛날에 일어났던 일들이 전혀 연상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성곽의 모습에서 사라진 성곽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필립 오귀스트왕이 파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세웠던 성벽 역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거나 무너져 내리고 말았는데 그 흔적은 소방서의 벽에, 지하 주차장에, 빌딩의 벽으로, 혹은 정원의 구석에도 남아있다고합니다. 프랑스사람들은 남아있는 성벽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물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로랑 도이치 지음, 파리 역사 기행, 126~139쪽) 프랑스 파리의 성벽과 우리의 서울 성곽을 비교해 보았을 때 어떤 입장이 옳은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법칙인 ‘복종’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러스킨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예술 영역에서 허용한 개인적 감정이 방종의 만연으로 귀결되었던 바가 건축에서 재현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건축이 인간에게 중요한 보편적인 모든 것들에 동의하고 인간과 관계 맺기를 주장한다면, 건축은 스스로 그 법칙에 당당히 복종하여 건축이 인간의 사회적 행복과 권리를 좌우하는 정치, 종교, 사회의 규범과 유사하다는 것을 제시했어야 했다.(258쪽)”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러스킨의 관심사는 관념적인 철학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경제도, 아름다움에 취한 예술도 아니었고, 오로지 우리 모두가 고귀한 인간성을 갖는 것이었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선한 정신 외에는 그 무엇도 개인의 탐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기 위해 절대선인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 그럼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출판사의 리뷰에서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러스킨은 “올바른 건축을 하기 위한 정신(등불)을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희생, 진실, 힘, 아름다움, 생명, 기억, 복종’이라는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방해하는 사치스러운 건축이나 무계획적인 개발, 정직과 양심을 저버린 날림 작업들, 토지나 건물이 개인의 사유물로만 바라보는 경향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고 하겠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라포르시안  webmaster@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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