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어수선하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제기된 정부기관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 의혹이 점점 구체화되고 실체적 진실로 떠오르는 형국이다. 지금까지 검찰의 수사를 통해 드러나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양상은 국민주권에 기반한 이 나라의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할 만큼 사안이 엄중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시민사회의 우려가 결코 과장된 건 아니지 싶다.

위기에 직면한 건 비단 정치적 민주주의뿐만이 아니다.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되는 보건의료 역시 비민주적 정책의 위협 앞에 놓였다. 보건의료 정책의 결정 과정이나 작동 방식 곳곳에서 민주적 의사결정이 무시되고 일방적인 의료산업화 논리만 기승을 부린다. 정부가 추진 중인 원격의료 허용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안이 대표적이다. 의료산업 육성 정책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선 개발독재 시대의 전근대성과  비민주성의 음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런 배경에는 현 정부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창조경제 활성화'란 실체도 불분명하고 개념도 모호한 국정과제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창조경제란 것이 기존 산업 체계에 그저 새로운 기술이나 사업 영역만을 덧칠했을 뿐 전혀 창조적이지 못하다. 시장만능주의와 성장지상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우려되는 건 창조경제란 의뭉스러운 구호에 갇혀 의료의 보편적 가치체계를 무시한 채 특정 산업계에 특혜를 주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사-환자간 원격의료 허용법안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보면 이런 우려가 든다. 의료와 사회, 나아가 국민 건강권에 대한 고민은 없고 오로지 상업적 논리로 무장한 정부부처들의 정책 전시장이 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이런 걸 한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몸달아 하는.  

정부는 의사-환자간 원격의료가 허용되면  IT와 의료기기 등의 관련 산업이 성장하고 의료취약지의 의료접근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공공의료 확충을 제대로 못한 탓이지 지리적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의 사례처럼 공공병원 주도 하에 정말로 의료접근성이 취약한 격오지를 대상으로 하는건 당연히 필요하다. 반면 우리나라처럼 의료자원의 지역간 불균형으로 생긴 의료접근성 문제를 원격의료로 보완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발상이다. 정부가 다하지 못한 공공의료 확충 책임을 상업적 논리로 풀겠다는 거다. 이미 꼬일대로 꼬인 의료전달체계 속에서 대형병원으로 환자 쏠림현상이 심하고, 동네의원이 과잉공급 상태에서 원격의료가 허용되면 의료공급 구조는 회복하기 힘든 비가역적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대기업을 비롯한 원격의료 서비스의 수혜 산업군은 성장할 지 몰라도 의료체계를 구성하는 환자와 의료공급자는 왜곡된 의료전달체계의 질곡에 빠지게 된다. 오로지 수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경영논리에 밀려 원격의료 서비스가 어떤 형태로 변질되고 환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의료비 부담을 더할지 예측불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끝에는 의료의 양극화와 건강불평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행위의 본질은 아픈 사람과 치료를 하는 사람 간 관계에 있다. 이러한 관계가 국가라는 규범체계로 들어오면서 점점 변형되고 왜곡됐다. 그나마 지금의 의료체계는 의사-환자간 대면진료를 원칙으로 의료행위의 본질을 미약하게나마 품고 있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의료보장제도와 자본화된 병원 속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사라졌다. 병원에서 발생하는 의사-환자 간의 관계는 의료제도를 사이에 두고 사용자와 공급자의 지불관계로 단순화됐다. 그 속에서 환자에게 생긴 질병과 치료만이 수치화될 뿐이다. 정량화 될 수 없는 환자의 고통은 외면받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 IT기술을 기반으로 한 의사-환자간 원격의료가 대면진료를 대체한다면 희미하게 그 형태를 유지하던 의료행위의 본질은 완전히 퇴색될 것이 분명하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더욱 우려스럽다. 의료 등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는 이 법안은 기획재정부 산하에 서비스산업 발전에 관한 주요 정책과 계획을 심의하는 '서비스산업선진화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사실상 보건의료 정책 영역을 경제부처에서 경제적 관점으로 조정할 수 있게끔 하는 법안이다. 지금도 보건의료 정책 입안·결정 과정에서 의료전문가와 시민의 참여가 배제되고 있는데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이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의료공급체계에서 의료전문가와 환자의 '타자화'가 더 심해진다.   

의료 분야야말로 가장 민주주적인 작동 방식이 구현돼야 한다. 의료윤리의 '4대원칙'이 이를 반증한다. 자율존중과 악행금지, 선행, 정의의 원칙 등은 의료행위가 얼마나 민주적이어야 하는지 곱씹게 만든다. 특히 현대 복지국가에 있어서 의료혜택의 분배에 관한 '정의의 원칙'은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된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산업화 정책은 이러한 의료혜택의 분배정의 원칙에 어긋난다. 의료혜택의 분배 과정에서 불평등과 불균형을 없애도록 의료정책이 수립되고 추진돼야 한다. 그것이 '의료 민주주의'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70년대 개발독재식 의료산업 부흥일 뿐이다. 정부가 원격의료 적용 대상으로 규정한 도서벽지 거주자와 노인, 장애인, 만성질환자 등은 의료산업 부흥을 이끌 산업역군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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