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수의 가슴앓이>

오랜만에 의대 동창들과 저녁도 먹고 가볍게 술을 마셨다.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개원 원장들과 가정의학과 의사인 나 네 명이 어울리고 있다. 의사들이 모이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주류를 이루는 대화는 최근 병원 사정이 어떠냐 하는 것들이다.

“고원장은 요새도 환자가 많지?”“말도 말아. 여기저기 병원들이 많이 들어서서 점점 환자가 줄고 있어. 우리야 감기로 먹고 살지만 내과나 정형외과는 그래도 할 만 하지?”“수가는 제자리고, 수술 하나 하더라도 겨우 인건비나 건지는데, 무슨 말이야? 내시경만 하더라도 5년 동안 써도 기계값도 못 건져. 점점 신형 기계도 나오는데....”

자기들도 그렇지만 다른 많은 의사들이 진료 시간을 늘린다든지, 미용이나 비보험 치료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는 추세에 한탄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정한 수가대로 하면 병원 경영이 힘드니 보험이 안 되는 진료를 하여 환자들로 하여금 모든 비용을 들이게 하는 치료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이 병원 수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많은 의사들에게 유혹이 되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대화를 하면서 결론은 항상 똑같다.

“정부는 일차의료에 관심이 없으니 우리 스스로 살 길 찾아야지, 뭐.”

동네의원은 모두 일차의료기관?

일차의료. 내가 하는 가정의학과나 내과는 물론 이비인후과나 정형외과도 모두 개원해 있으면 모두 일차의료라고 여기는 게 현실이다. 이 날 모인 우리뿐만 아니라 개원해 있는 안과나 산부인과 등 모든 개원 병원들은 일차의료 병원이라고 알고 있다. 이게 문제다.

얼마 전에는 대한의사협회와 보건복지부가 모여 일차의료 활성화에 대한 의견을 같이 하였고, 2013년 11월 4일 보건복지부는 ‘일차의료 살리기 협의체’ 구성계획을 발표하면서 매월 2회씩 회의를 통해 의‧정간 의견을 조율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주요 의제를 ‘의원급 의료기관의 활성화 정책’, ‘의원들의 경영 개선 방안’, ‘의원들의 규제 완화’ 등으로 하고 있다. 이 모든 주제들이 일차의료 강화란 말 속에 요약되었다.

모여서 같이 얘기하던 동료 의사들이나 그 대변자인 의사협회나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 모두 일차의료에 대한 개념조차 잡고 있지 못하고 정책을 얘기하는 게 대한민국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수준이다. 잘못된 정의나 내용이 결국 잘못된 정책으로 이어지는 데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제 오늘의 일만도 아닌 것이 의사협회장을 뽑는 선거에서도 후보자들은 일차의료 강화를 얘기하면서 늘 한결같이 ‘수가’나 ‘동네의원의 경영난’을 강조한다. 그 어느 후보도 제대로 된 일차의료를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그만큼 한국에서의 의료, 특히 일차의료는 왜곡되어 세상에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일차의료란?

일차의료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정의나 미국 의학연구소, 유럽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정의를 요약해 보면 ‘지역 주민들의 건강상의 많은 문제들을 자신을 잘 아는 의사가 포괄적이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면서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예방 및 건강증진 등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동네의원인 것은 맞으나 포괄적, 지속적, 치료, 예방, 건강증진 등의 요소들이 들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포괄적이란 말은 질병에 관계없이,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진료를 하는 것이고, 일차의료 의사는 치료뿐만 아니라 예방이나 건강증진의 내용까지 담당해야 한다.

선진 외국의 일차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은 모두 GP(General practitioner)나 Family doctor로 불리며 4~5년의 전문 과정을 습득하고 지역에서 이러한 일차의료를 담당한다. 그들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웬만한 질병들을 고루 다루면서 자신들이 직접 해결하거나 의뢰를 하면서 치료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나라에서 개원해 있는 대부분의 의원들은 일차의료기관이 아닌 것이다.

정형외과는 뼈나 근육만을 보고, 소아과는 아이들만 보고, 안과는 눈만 보고, 이비인후과는 얼굴만 보고, 피부과는 피부만 보고, 산부인과는 분만이나 여성의 생식기만 다루는데 무슨 포괄적인 진료를 하겠는가? 내과 의사들도 어른의 질환만 다루지만 이비인후과나 정형외과적 질환들은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의사들이나 의사협회, 보건복지부는 동네의원이면 이들 모두를 일차의료기관이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러니 거기에서 나오는 일차의료 관련 정책들이 얼마나 문제가 있겠는가.

외국을 여행하는 분들이라면 앞으로 거리를 걷다가 유심히 살펴보길 권한다. 동네의원에 소아과가 있는지, 동네의원에 이비인후과가 있는지, 동네의원에 정형외과가 있는지 말이다. 전혀 없다.

웬만한 질환들은 GP나 Family doctor로 불리는 일차의료 전문의들이 진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전문의들은 모두 종합병원에 있으면서 중병이나 일차의료에서 다루기 힘든 질환들을 전문 의술을 가지고 치료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기껏 4년 넘게 배운 전문 기술들을 감기 환자나 다루는 식으로 추락한다. 얼마나 낭비인가.

병원 경영의 가장 큰 문제인 수가를 정상화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우리 의료계의 과제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의료전달체계와 그 속에서 중심을 이루는 일차의료의 제자리 잡기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씩 포괄적인 의료를 담당하는 일차의료 전문가들을 키워내고 많은 전문의들은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으로 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가파른 우리나라의 의료비 상승을 억제하는 길이고, 의사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길이다. 또한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올바른 일차의료의 관점에서 정책이 나와야 왜곡된 의료정책을 하루 빨리 제자리 잡게 만드는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일이다.

고병수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현재 제주도 '탑동 365일 의원'을 공동 개원해 운영하고 있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서 보건복지분야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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