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파괴하는 모든 차별 반대...조속한 법제정 촉구" 선언
차별금지법은 건강불평등 줄이는 강력한 공중보건 수단

[라포르시안]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2명의 인권활동가가 국회 앞에서 보름 넘게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을 향한 지지와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가 커지는 가운데 보건의료인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공동 선언문을 냈다. 

차별이 차별받는 사람의 건강권을 침해하고, 특정한 개인과 집단의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차별 금지가 건강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중요한 공중보건 정책으로 꼽힌다.  

보건의료인 754명은 지난 29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들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은 발의된 지 14년이 지나도록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건강권 역시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보건의료계 754인은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한다"고 선언했다.

특히 "차별이 당사자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침해할 뿐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구성원 전체의 건강 수준이 낮다는 것은 이제 보건의학적 상식"이란 점을 거듭 강조했다. 

현재 국회에는 2020년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과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법',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 등 3건의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다. 

차별금지법의 핵심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 등 어떠한 사유로도 차별을 받지 아니할 것을 명문화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일부 세력의 주장을 핑계 삼아 법제정을 계속 미뤄왔다고 보건의료인들은 지적했다. 

이들은 "차별금지 대상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해야 한다는 일부 보수·기독교단체의 주장이나 학력 및 병력, 출신 국가, 가족 형태 등에 대한 차별금지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저해할 것이라는 일부 재계의 주장은 인권적으로도 말이 안 되지만, 보건의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며 "차별이 건강을 침해하는 객관적 근거는 차고 넘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일상적 차별 경험은 우울증, 불안증상, 심리적 고통 및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이 있으며, 차별로 인해 받는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심혈관계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적지 않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주요 특징인 '과각성'은 억압받는 인종, 트랜스젠더 및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별로 인한 받는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심혈관계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에서 흑인과 여성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고혈압은 차별이 심혈관계 질환에 미치는 영향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인종 차별과 성차별은 고혈압, 혈관내막 두께 및 심박수 변동성을 포함한 심혈관계 질환을 일으키는 임상 지표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됐다.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이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다는 수많은 연구를 종합해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UN 산하 12개 기구는 차별적 관행으로부터 성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보건의료인들은 "차별금지법은 특정한 개인과 집단이 직접적으로 겪을 수 있는 차별을 설명할 법적, 제도적 언어를 제공한다"며 "때문에 차별이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일으키는 건강문제를 예방할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고, 의료접근권을 향상시킬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보수적인 의료계의 분위기로 인해 직간접적인 차별을 받고 있을 수많은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의 삶의 질 또한 개선할 것"이라고 했다. 

일부 의료인들이 의학을 참칭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으나 이는 전 세계 보건의료계가 근거를 중심으로 합의한 의학적 결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대 의학은 정체성의 문제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임의적인 구분을 더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이 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및 사회적 또는 직업적 능력의 손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차별이 있는 한 온전한 건강은 없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즉각 제정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차별금지법이 현대의학의 핵심 패러다임인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과 적극 부합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관련 기사: 현대의학은 수십년 전 ‘동성애’를 질환 목록서 삭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연대발언에 나선 최규진 인하대의대 교수는 "차별금지법은 근거중심의학에도 부합할 뿐 아니라 환자들의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전 세계적으로 차별금지법은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금지를 법에 담아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건강권을 증진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보건의료인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며 "무엇보다 그것이 과거 ‘의학’이라는 미명 하에 상처받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한국 의료계가 국제적인 수준으로 질적 도약을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주희 간호사도 연대발언을 통해 "혐오라는 색안경을 벗어내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할 수 없으며, 편견으로 이루어진 잣대로 이루어지는 의료계 내의 차별과 혐오 또한 보편적인 인간의 건강권을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며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 한 명의 행동하는 간호사로서, 더 나은 보건의료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에 백신 공급 불평등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코로나19 재유행이 확산되면서 백신 차별에 따른 엄청난 후폭풍을 경험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사회가 차별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으며, 이러한 차별이 다시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동근 약사는 연대발언에서 "차별은 건강위협의 원인으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동네 약국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나 청각장애를 가진 장애인인 약국에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나아가기 위해 차별을 이제 금지하자는, 혐오가 퍼지는 사회를 막자는 이 법안을 꼭 통과시켜 달라"고 정치권을 향해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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