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흙바닥에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오징어 모양을 대충 그려놓고 하던 놀이였다. 그 놀이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줄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동네 아이들에게 '오징어 게임'은 꽤 거친 놀이였다. 자신과 다른 친구들 사이에 힘과 체격의 우위를 인식하게 하는 통과의례 비슷한 놀이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동네 꼬마들의 통과의례 놀이를 456명의 참가자가 모여 생사를 다투는 잔인한 생존게임으로 변형시켰다.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456억원이란 돈이면 목숨까지 내걸고 참여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드라마 속에선 이야기 전개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게임 참가자 저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을 얹었다. 주인공인 '456번 성기훈'.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후 사채와 도박판을 전전하던 와중에 자신의 어머니가 당뇨병성 족부병증이란 합병증 때문에 당장 입원치료가 필요한 상황을 맞는다.

‘당뇨발’로 불리는 당뇨병성 족부병증은 당뇨병으로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기면서 심장에서 가장 먼 발가락 끝이나 발뒤꿈치 피부가 검게 변하고 괴사하는 질환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어머니 발바닥은 시커멓다. 커다란 궤양도 생겼다. 증세가 심각하지만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해 하루 벌어 하루를 견디는 처지다. 하나뿐인 아들마저 변변치 않은 데 입원치료는 언감생심이다.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병원을 그냥 나온다. 

"입원하라잖아 / 괘않아 / 걸음도 잘 못 걸으면서 치료 안 받으면 큰일 난다잖아 / 내가 누워있으면 월세는 누가 내고 병원비 약값은 얼만 줄 아나?/ 보험 있잖아! / 보험? 니 기억 안 나나. 그거 벌써 해제해 다 써버렸잖아. 엄마 피곤하다. 힘들어, 인자 고마하고 싶다. 고마하자 / 내가 돈 가져올게, 돈 가져오면 될 거 아냐"

병원 앞에서 주인공 모자가 나누는 대화다. 기훈이 '오징어 게임' 참가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어머니 병원비 때문이었다. 당뇨발 치료를 위한 드레싱 제품이나 의료기술이 발전했지만 급여기준 때문에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해 비용 부담은 만만치 않다. 당뇨발을 앓는 환자 중에는 경제활동이 어려운 고령층이 많다. 이들에게 비싼 진료비는 의료이용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높은 문턱으로 작용한다. 

최근 보라매병원 연구팀이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저소득층 당뇨병 환자일수록 당뇨발 발생 시 5년 내 사망할 위험이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약 2.65배 높았다. 족부 절단 위험은 저소득층 환자가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최대 5.13배까지 컸다. 의료이용 문턱이 높은 취약계층은 당뇨병성 족부병증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취약계층 당뇨환자에 대한 정기적인 검사 지원 등 국가차원의 의료지원이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연구팀은 제안했다. 앞서부터 의료 전문가들은 당뇨발이 적절한 시기에 효과적인 치료가 이뤄져야하지만 제한적인 건강보험 급여기준 탓에 경제적 취약층 환자가 적극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급여기준 개선을 요구해 왔다. 급여기준 개선이나 보장성 확대가 필요한 게 어디 당뇨발 뿐이겠나. 문재인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률 70% 달성을 목표로 보장성 강화 정책을 펴고 있지만 보장률은 64.2%(2019년 말 기준)에 그치고 있다.  

오징어 게임 또 다른 참가자 '199번 압둘 알리'는 외국인 노동자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일부 절단되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하지만 임금 체불로 돈이 없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드라마 속에서 그는 공장 사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나 손가락 치료 잘 못 받았어요. 병원비 제대로 못 받았어요. 제발 돈 주세요". 두툼한 돈봉투를 앞에 두고도 사장은 "나도 아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냐. 병원도 못 가. 돈이 없어서"라고 받아친다. 

199번 참가자는 의료보장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드러낸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라도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강제 출국에 대한 두려움과 산재 처리를 꺼리는 사업주들 탓에 다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작업용 엘리베이터 추락으로 다진 외국인 노동자들이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치료를 받지 않은 채 사라진 일도 있었다. 미디어에선 외국인 노동자를 건강보험 재정을 좀먹는 '먹튀'로 왜곡한다. 가난한 사람이든, 불법 체류자든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가 보편적 인권이란 사실을 깜빡깜빡 잊는다. 

오징어 게임은 승자가 다 갖는 '제로섬 게임(zero-sum)'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고 다를까. 어쩌면 이 세계가 거대한 '오징어 게임' 실사판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 백신 공급 불평등은 이를 방증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아프리카 저개발국 등 전 세계 56개국에서 백신 접종률이 여전히 10% 미만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 등의 백신 생산국이나 부자나라에선 백신 접종 효과를 높이기 위한 추가접종을 하고 있다. 모든 국가가 국경을 폐쇄하지 않는 한, 가난한 나라들까지 충분한 백신 공급이 이뤄지지 않는 한 코로나19 펜데믹 사태 종식은 불가능하다는 게 시민사회와 공중보건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백신 접종률이 낮은 지역에서 변이바이러스가 계속 발생하면 결국 백신 효과를 무력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백신 공급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백신 분배정의 실현은 요원하다.  

게임 참가자들 간 벌어진 한 밤의 난투극 속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는 어쩌면 지금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다. "제발 그만해, 나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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