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이나 고혈압 등을 ‘생활습관병’이라 부른다. 90년대 후반부터 일본 등 외국에서 '성인병'이란 명칭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2003년 대한내과학회 주도로 '성인병'이란 명칭을 '생활습관병'으로 개칭했다. 이 명칭에는 당뇨병 등의 질환이 개인의 식습관이나 음주, 흡연, 운동, 영양상태 등 일상생활 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당뇨와 고혈압 등의 발병이 일상 생활습관과 무관치 않음을 보여주는 역학연구도 많다. 이런 연구결과와 맞물려 생활습관병이란 용어는 질환의 발병을 오롯이 환자 개인 탓으로 돌렸다.

과연 그런가. 개인의 각종 생활습관이 온전히 개개인의 의지로 조절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개인의 식습관이나 음주, 흡연, 운동, 영양상태 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정치적 요인이 더 크지 않을까.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과정에서 형성된 ‘빨리빨리 문화’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은 위한 배려(?) 차원에서 저렴하게 공급된 술과 담배 소비정책의 잔재는 아닌가. 독재국가일수록 술과 담배 가격이 낮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거창하게 독재정권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OECD 회원국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우리나라의 근로여건은 개인의 건강한 생활습관을 훼방 놓는 중요한 변수임이 분명하다. 근로환경의 개선 없이 건강한 몸을 위한 생활습관을 갖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런 관점에서 생활습관병이란 용어는 옳지 않다. 오히려 ‘사회경제적 질병’이란 용어가 더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감염병은 또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감염병은 공중보건 문제가 아닌 개인위생의 영역에 더 가깝다. 2009년의 신종플루 사태를 떠올려보자. 당시 국가적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대응은 어땠나. 신종플루 대유행의 위기 상황에 직면한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돼지고기 시식회였다. 신종플루 감염 우려로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하자 양돈농가를 위해 의사, 국회의원까지 나서 국산 돼지고기 시식하는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신종플루가 확산된 이후에는 부족한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보건당국 책임자가 다국적 제약사 본사까지 찾아가 구걸하다시피 했다.  

12세 이하 영유아 국가필수예방접종비 지원 확대 예산이 국회에서 수차례 삭감당했던 기억도 불쾌하고 짜증나기 그지없다. 그런 국회에서 국정감사 때마다 보건당국의 감염병 예방 과 대응 능력을 지적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나 다름없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병원감염 수가를 책정해 놓고 때마다 병원감염 문제를 들고 나와 의료기관을 당황케 만드는 보건당국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건강권은 기본권 중 하나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에 속한다. 국가가 사회보장과 사회복지 증진 노력을 통해 모든 국민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건강권은 전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건강권 보장의 의무가 국가에 있다는 엄염한 사실이 외면당한지 오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많은 국민이 건강권을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다. 공중보건의 문제나 만성질환 관리가 건강권 보장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는 이유다. 

유신 시절에는 '체력장 제도'란 게 생겼다. 달리기와 멀리뛰기, 공던지기(초기에는 모조 수류탄 던지기) 등을 통해 학생들의 체력을 평가해 점수로 매겼다. 체력장 점수는 대학입시성적에 반영됐다. 학생들의 체력에 대한 일제고사인 셈이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군사정권의 구호 아래 학생들의 체력을 규격화하고 등급화해 점수로 매기는 체력장 제도에 애초부터 건강권이란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오로지 개인의 신체능력에 따른 등급과 차별만이 부각됐다. 최근 들어 학생들의 체력이 떨어졌다며 체력장 제도의 부활의 주장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섬뜩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2일 박근혜정부 국정과제인 '국민 체력인증 기본계획'(사업명: 국민체력 100)을 발표했다. 문화부에 따르면 국민체력인증은 국민들이 건강유지와 질병예방을 위해 갖춰야 할 건강 체력 수준을 인증기준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체력인증이‘예방의학적 관점’에서 종합적인 건강관리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특히 학교, 민간기업,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체력인증 기준을 보급해 이 기준이 취업, 승진 등을 위한 체력측정 기준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정책을 확대 해석하면 일종의 '전 사회적 체력장 제도'의 부활로 볼 수 있다. 체력인증 기준을 만들어 보급할테니 여기에 맞춰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체력을 키우고 건강을 유지하라는 의미다. 문화부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국민 개개인이 원하는 대로 건강유지를 위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취업과 승진에 적합한 신체를 가꾸는 책임을 개인에게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건강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의무가 어느새 건강한 체력을 유지해야 하는 국민의 의무로 둔갑했다. 뜬금없고 황당하다. 현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일자리 중심 창조경제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스파르타식 체력증진 학원' 개설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는 아닌지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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