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년 전인 2003년의 일이다. 당시 우연찮게도 특종을 하게 됐다. 현역 국회의원이 한 국립대병원의 전공의를 폭행한 사건이었다. 의료계 관련 단체의 종사자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제보자에 따르면 모 국립대병원에서 당시 한나라당 소속 H 의원이 자신의 부인이 암 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한 내과전공의를 폭행했다는 것이었다. 그 의원은 내과전공의에게  "의사를 하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부인 앞에 데리고 가 무릎을 꿇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곧바로 대한전공의협의회와 해당 병원을 통해 확인 취재를 했다. 제보자의 말은 사실이었고, 단독 보도를 냈다. 그러자 중앙일간지 등에서 이 사건을 후속 보도하면서 후폭풍이 거셌다. 논란이 거세지자 의사단체가 나서 해당 국회의원이 속한 정당을 항의방문하는 등 유감을 표명했다. 결국 H의원이 이듬해 실시된 17대 총선에 불출마하면서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정치권력이 의학을 유린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정치권력, 혹은 자본에 의해 의사의 전문성과 직업윤리가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일은 여전하다. 나아가 의학이 스스로 정치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며 의료전문주의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최근 사회적 공분을 산 '사모님 허위진단서' 사건만 해도 그렇다. 청부살해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한 중견기업 회장 '사모님'이 유방암 치료를 이유로 형집행정지가 됐고, 이후 수차례 연장 처분을 받으며 대학병원 특실에서 편하게 지내온 사실이 드러났다. 중견기업 사모님의 형집행정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그 대학병원 소속 교수가 작성한 진단서였다. 하지만 의료전문가들조차 그 진단서는 허위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최근엔 이런 일도 있었다. 건설업자로부터 성접대를 받은 의혹을 받고 있는 전직 고위 공직자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맹장수술을 받고 한 달째 입원 중이라고 한다. 관련 뉴스를 보니 그는 변호인을 통해 ‘맹장 수술 때문에 20일간 입원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하고 경찰출석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맹장수술의 경우 평균적인 입원기간은 4~5일 정도다. 환자의 상태나 수술방법에 따라 짧게는 2~3일이면 퇴원하기도 한다. 물론 회복이 늦거나 복막내 농양, 복막염 등의 합병증이 있다면 입원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

그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경찰 소환을 피하기 위한 '입원 꼼수'는 아닌지 의심하는 눈초리도 많다. 여태껏 그런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대기업 경영자 중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지병을 이유로 입원하거나 휠체어를 타고 검찰청에 나타나는 일을 흔히 봐왔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의학이 기득권층의 죄를 탕감시켜 주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얼마 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계열사에 수천억원대의 손실을 떠넘긴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H그룹 회장. 그는 2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현재 감옥살이를 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건강 악화로 구속집행정지를 받고 모 국립대병원에 입원했으며, 지난 5월 또다시 우울증 등의 증상이 심해 장기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주치의의 판단을 재판부가 받아들여 오는 8월 초까지 또 다시 구속집행정지가 연장됐다. 과연 일반인이었다면 우울증을 이유로 구속집행정지가 가능했을까 싶다. 우울증 등으로 '회장님'의 장기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주치의의 판단을 접한 의사들 중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이들도 있었다. 

언제부터 링거주사기와 휠체어, 혹은 침상과 흰가운을 입은 의사가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의 필수 아이템이 됐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언제부터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의학적 견해를 사법부가 그렇게 넙죽넙죽 받아들여줬는지도 모르겠다. 사안이 다르긴 하지만 임의비급여 판결만 놓고 봐도 그렇다. 법원은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의사의 의학적 판단에 따른 임의비급여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수년간의 지리한 법정공방 끝에 대법원에서 '의학적 임의비급여'를 허용하는 판단을 내렸다. 그런 법원이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판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범죄인의 형집행정지를 결정했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의학이, 의료전문가의 직업윤리가 정치권력과 자본의 몰상식에 이렇게 관대해도 괜찮은가. 정치권력과 자본이 잘못을 저지르고 그에 따른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수단으로 의학이 이용되는 것에 분노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래도 괜찮은가 싶다. 여담이지만 오늘(7월 1일)부터 종합병원 이상 의료기관에도 7개 질병군별 포괄수가제가 확대 적용된다. 처치나 입원기간 등 의료행위의 양에 상관없이 대상 질병별로 정해진 진료비만 지불하는 방식이다. 의료기관 입장에선 원가절감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환자의 입원기간은 짧을수록 유리하다. 포괄수가제 하에서라면 맹장수술을 받고 한달 가까이 입원한 전직 고위공직자는 해당 병원에 큰 손실을 끼치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드는 생각인데, 앞으로는 맹장수술 핑계로 장기 입원 치료를 받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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