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와 기호들 / 질 들뢰즈 지음 / 서동욱과 이충민 옮김 / 민음사 펴냄, 2004년

지난 해 6월 초순 ‘스완네집 쪽으로’편을 읽기 시작해서 10월 중순 ‘되찾은 시간’편까지 한 여름의 더위와 더불어 자신의 인내심과 겨뤄본다는 느낌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했던 것 같습니다. 출발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였습니다. 그가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조나 레러 지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148쪽)”는 부분을 인용하고, 미각과 후각이 인간의 기억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끌렸던 것입니다. 오감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얻은 자극이 잊고 지내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경우는 없으신가요? 제 경우는 프랑스의 기타리스트인 클로드 키아리(Claude Ciari)가 연주하는 <안나를 위한 노래(Song for Anna)>를 들을 때마다 대학 시절 친구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친구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첫째 편, ‘스완네집 쪽으로’에서 등장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제 프티트 마들렌을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에서 다시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들렌을 맛보던 순간에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 온 지적인 의혹이 운산무소(雲散霧消)되었다. 아까 나의 문학적 재능의 실재와 문학 자체의 실재에 대해 나를 괴롭히던 의혹은 마법에 걸린 듯 없어지고 말았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250쪽)”고 적어 프루스트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이 더 멀어져 가고 불확실해지기 전에 기억의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잠시 리뷰 읽기를 멈추고 시계바늘을 옛날로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의 전체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래서 평소에 겪은 일들을 메모해두거나 소상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다시 저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북소리]에서도 소개드렸던 알랭 드 보통이 쓴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으면서입니다. 자기계발서로 분류되고 있는 이 책에서 보통은 프루스트의 작품과 편지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어떻게 하면 시간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알랭 드 보통 지음,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15쪽)”라고 요약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는 방법을 더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국일미디어판을 다 읽고 난 뒤에 새롭게 번역한 민음사판을 읽을 기회가 생긴 것도 계기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 길’이라는 부제가 달린 유예진 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을 통해서 당시 프루스트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작가들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화가들>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같은 맥락에서 읽게 된 책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이자 작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철학, 문학, 영화, 예술 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저작들을 썼다고 합니다. 들뢰즈에게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칸트, 니체 등을 재해석하는 철학사가로서의 모습과 감각, 사건, 정신분열, 영화, 철학 등과 같은 다방면의 개념들에 대하여 철학적 해석을 하는 생성의 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두 가지 모습이 들뢰즈의 ‘실체’와 ‘양태’로 서로 어긋남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철학적 분석과 해석의 시각으로 읽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1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에 관한 것을, (…) 2부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하는 측면에서 기호들 자체의 생산과 증식을 다루고 있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긴이들은 역자서문에서 ‘들뢰즈의 프루스트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내놓고, 먼저 들뢰즈의 대표적 작업을 생의 전반기에 집중했던 사유의 문제와 생의 후반기에 집중했던 욕망의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통하여 임의적 사유의 공리로부터 출발한 그리스시대 이래의 서양철학과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 들뢰즈는 (서양의) 철학자들은 개념을 창안하고 개념을 사유하는 반면, 동방의 현자 - 즉, 유대출신의 프루스트는 아마도 형상(figure)을 통하여 사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포크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마들렌의 맛 같은 것 속에 감싸여 있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들’ 혹은 내가 머리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던 형상들의 도움으로 씌어진 진리들이다. 내 머리 속에서는 종탑, 무성한 잡초 등의 형상이, 복잡하게 잔뜩 엉킨 판독할 수 없는 글씨를 조판하고 있었다(…)(되찾은 시간, III, 878-880)”[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텍스트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판(1954년, 전3권)이라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텍스트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본질은 마들렌과자나 포석(鋪石)을 매개로 하여 콩브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마들렌과자나 어머니와 함께 갔던 베니스의 생 마르탱 성당의 추억을 떠올리는 기억의 탐색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즉 무의식적 기억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작가가 배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와 관련되기 마련인데, 프루스트는 살롱으로 대표되는 사교계를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등과 같은 예술적 기호들 뿐 아니라, 외교, 정치, 사회, 전술, 의학 등 다양한 사회학적 기호들을 이끌어 촘촘히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작업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데트와 스완, 그리고 화자와 알베르틴과의 사랑이야기는 단순히 쾌락과 질투와 같은 고통스러운 면 이외에도 그 안에서 사랑의 기쁨이라는 참된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상황에서 드러나는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독하고, 번역하고 그리고 설명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진실 찾기’인데, 이 과정은 기호 자체의 전개와 뒤섞이기 때문에 시간이 관계되며, 진실은 시간의 진실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존재를 변화시키고, 존재했던 것들을 없애버리는, 지나가는 시간일 뿐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는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의미는 잃어버린 시간이 영원성을 갖도록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헛되어 보냈다고 생각하는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곧 배움의 본질입니다.

들뢰즈는 기호가 사유를 강요한다고 보았습니다. “감각적 기호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기억력을 동원하고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혼이 사유를 움직이게 하고 사유에다 감성이 당하는 압박을 전해준다. 그리고는 마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인 듯이 사유에게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이때 능력들은 초재적인 실행을 하게 된다. 이 실행 속에서 각각의 능력(기호를 포착하는 감성, 기호를 해석하는 영혼과 기억력, 본질에 대해 생각하도록 강요된 사유)은 자신의 고유한 한계에 직면하고 거기에 도달한다.(151쪽)”고 설명하였습니다.

2부에서 만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서야 깨닫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통일성입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부분 간의 부조화, 불균형, 조각남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통일성의 개념을 창조하고 있다고 읽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완네집 쪽으로’에서 설명하고 있는 산책길의 두 방향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시간상의 이유 때문에 한 번의 오후에 한쪽 길밖에 이용할 수 없는 제한점을 가지고 있어 두 길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개의 산책길은 프루스트가 탐구해온 부르주아 계급과 귀족 계급의 방향을 상징하는 기호라고 할 수 있는데, 메제글리즈 쪽 사람인 질베르트(스완의 딸)과 게르망 쪽 사람인 생 루(게르망트공작의 조카)가 결혼하여 딸 생루를 낳는 것으로 합쳐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들은 시간이라고 하는 횡단선으로 연결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토리를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영역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과 본질들로 정의됩니다. 가장 특정한 것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추억과 본질들에] 해당하는 시간인 되찾은 시간의 생산에 의해, 생산 조건과 생산자(자연적 기호들과 예술적 기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영역은 예술 및 예술 작품에 관여하는데, 불완전한 두 번째 영역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즐거움과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그 다른 것은 사교계의 기호 혹은 사랑의 기호로서 잃어버린 시간의 생산에 개입하는 모든 것입니다. 세 번째 영역은 역시 언제나 예술에 간여하는데 <보편적인> 변질, 죽음과 죽음의 관념, 대재앙의 생산(노쇠, 병, 죽음의 기호들)을 통해 정의된다고 합니다. 모든 문제는 이 세 영역의 본성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는 사교계의 가치들을 사교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잘것없는 즐거움과 한 종류로 묶고, 사랑의 가치들을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종류로 묶으며, 잠의 가치들조차 수면 중의 꿈들과 한 종류로 묶어 버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천직>이 문인(文人)이기에 이 모든 가치들을 통해서 어떤 <배움>을 얻는다.(235쪽)”라고 보았습니다. 세 가지 영역을 연결하는 것은 <부분적 대상들의 기계(충동)>, <공명기계(에로스)>, <강요된 운동의 기계(죽음)>의 세 가지 기계로 각각의 진리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부분적 대상들의 분할을 통해서, 되찾은 시간은 공명을 통해서 생산된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은 이와는 다른 방법, 즉 강요된 운동의 폭을 통해서 생산된다. 이때 이 상실, 이 잃어버리는 일은 바로 다름 아닌 작품이 되며, 또 작품이 형태를 갖추기 위한 조건이 된다.(249쪽)”

어느 독자는 김용규님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를 읽고 ‘꿈(문학)보다 해몽(철학, 해석)이 더 재미있다’고 적었습니다만, 들뢰즈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해석은 재미보다는 날카롭다는 느낌을 남기는 책읽기였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들뢰즈의 철학적 분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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