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인력 부족에 노동력 쥐어짜기도 한계..."인력 확대 없이는 진료정상화·의료공공성 확보도 불가능"

한 대학병원 병동의 복도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한 대학병원 병동의 복도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라포르시안] "의사인력 부족 문제는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역의 의사인력 부족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전공의법 시행 이후 전공의 퇴근시간이 지나면 지방의 상급종합병원은 병동에 의사가 없는 ‘무의촌 상황’으로, 야간 응급실 내원 환자가 의사가 없어 적절한 치료 및 응급수술 등을 받을 수 없으며, 각 상급종합병원 응급실 간 연락으로 응급실 투어를 해야 하는 실정이다.”

한 지방 사립대병원 관계자의 말이다. 

한국 의료시스템이 의료인력 문제로 골병을 앓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겉으로 보기에 병상과 고가 의료장비는 넘치고, 국민의 외래진료 횟수는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고, 국민의 건강수준을 나타내는 기대수명이나 영아사망률 같은 각종 지표도 상위권을 기록할만큼 멀쩡하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위태위태하다. 특히 병원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료인력을 쥐어짜듯이 돌리고 있어 환자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발표한 'OECD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 2019;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한국의 임상 의사 수는 한의사를 포함해 인구 1,000명당 2.3명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적었다. OECD 회원국 평균은 3.4명이다.

반면 2017년 기준으로 병원의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12.3개로, OECD 평균(4.7개)의 약 3배에 달하며 일본(13.1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편이다. 국민 1인당 의사 외래진료 횟수는 16.6회로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주당 80시간이 넘는 의료인력의 장시간노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최근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기획홍보위원회가 흉부외과 전문의 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근무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12.6시간에 달했다. 13시간 이상 근무한다고 답한 비율도 66%에 달했다.

흉부외과 전문의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76.1시간이었다. 주당 평균 81시간 이상 근무한다는 응답 비율도 36%였고, 100시간이 넘는다는 응답자도 9명이었다. 조사 대상 중 20명(21%)은 일주일에 7일 모두 근무한다고 답했다.

전공의의 주당 근무시간을 80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전공의법이 시행된 이후에는 대학병원 교수들의 근무시간이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전공의법을 제정한 이유가 환자안전 때문인데, 환자안전에서 전공의보다 더 중요한 전문의들이 번아웃 될 지경에 처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은 병원이 규모에 맞게 적정 의사인력을 확충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원들은 의사인력 확충에 따른 인건비 부담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무엇보다 한국 의료시스템 자체가 낮은 의료수가에서, 적은 인력으로, 최대한 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박리다매' 방식으로 굴러가게끔 짜여 있어 '적정 의료인력 확충'이 끼어들 틈이 없다.

병원내 의료인력의 절대적인 양적 부족과 그로 인한 의료의 질적 하락은 필연적이다. 대부분의 병원에서 5명이 해야 할 일을 1~2명의 인력으로 메우는 방식으로 의료서비스가 제공된다. 인력을 갈아 넣고 노동력을 쥐어짜는 식이다. 대형병원에서 이해하기 힘든 의료관련감염 사고가 발생하고, 환자안전 사고가 끊이질 않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일상적인 장시간 노동과 그에 따른 '번아웃(소진, Burnout) 증후군'에 시달리는 의사가 적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의 질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하하다. 건강보험제도 아래에서 의사인력 확대를 비롯한 보건의료인력 적정 수급 방안을 찾는 건 개별병원 차원을 넘어선 국가적 과제이다. 

"의사인력 부족,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한계치 도달"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13일 국회 정문 앞에서 '공공의료 강화 및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공공의료대학) 설립 촉구와 불법의료 근절 및 의사인력 확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의사 인력 확대하라는 요구를 갖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그만큼 의사 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환자와 국민의 건강권에 심대한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나 위원장은 "지난 10년 간 병상 수는 30% 증가했고, 노인인구 증가와 재택진료 및 일차의료 왕진서비스 활성화 정책 등으로 의사가 더 많이 필요해지는 상황에서 지난 20년간 의과대학 정원은 단 한 명도 늘어나지 않았다”며 "전공의법이 시행됐지만 줄어든 근무시간만큼 인력이 충원되지 않아 의사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하고, 많은 의사 업무를 간호사들이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종합병원급 이상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PA(진료보조인력)로 불리는 간호사가 의사의 진료업무를 대체하고 있다. 전공의들은 수술실에서 PA에 밀려나고 있으며, 각종 검사나 수술술기를 배울 기회를 빼앗기고 있어 양질의 전문의 인력 양성이라는 수련병원의 근본 목적을 상실했다.

보건의료노조가 올해 사립대병원과 국립대병원 등 전국 42개 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료법 위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PA간호사는 42개 병원 중 29개 병원(69.04%)에서 운용하고 있었다.PA간호사를 운용한다고 응답한 29개 병원에서 근무하는 PA간호사수는 총 971명으로 병원 1곳당 평균 33.48명에 달했다. 특히 일부 병원은 PA간호사만 100명이 넘었다.

PA간호사가 수행하는 업무 중에는 수술, 환부 봉합, 시술, 드레싱, 방광세척, 혈액배양검사, 상처부위 세포 채취, 초음파, 방사선 촬영, 진단서 작성, 투약 처치, 주치의 부재시 주치의 업무 대행 등 반드시 의사가 해야 할 업무도 많았다.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다.

지난 13일 국회앞 기자회견에서 노귀영 보건의료노조 고신대복음병원지부장은 “의사가 없는 현 실정에서 상급종합병원의 불법적 의료행위는 더 이상 숨길수도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고 말았다”며 “실제 PA 간호사 입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 업무라고 판단돼도 실제 인력이 없어 거절하지 못하거나 의사-간호사 간 위계에 의한 지시, 병원의 암묵적 동의와 압박으로 시행하는 불법의료를 개인의 의지로 거절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했다.

의사인력 확대가 절실하다. 특히 의사인력 수급불균형은 지역간 건강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지방에 살면 죽고, 서울에 살면 살아날 수 있다'라는 말이 굳어지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인구 1,000명 당 활동 의사 수는 서울이 2.9명이고 경북은 1.3명으로 2배 이상 차이가 났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강남과 경북 영양군의 치료가능사망률은 3.6배 넘게 차이가 난다. 산모가 분만의료기관에 도달하는 시간이 서울은 3분이지만 전남은 42분에 달한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의사인력 부족으로 의료현장은 아수라장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과로 문제는 한계치에 다다랐다"며 "병원의 의사 수 부족은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한다. 환자를 치료할 의사가 없고, 의료의 질이 하락하는 것을 넘어 지방에서는 의사가 없어 진료과를 폐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의사인력 확충에 반대하는 그 어떤 주장에도 합리적 근거와 정당성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의료현실은 의사인력 확충없이는 진료정상화도 의료 공공성 확보도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며 "의사인력 부족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한계치에 도달했고, 의사인력의 확충과 안정적 수급방안을 시급히 마련하기 위한 사회공론화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13일 국회 정문 앞에서 '공공의료 강화 및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공공의료대학) 설립 촉구와 불법의료 근절 및 의사인력 확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제공: 보건의료노조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13일 국회 정문 앞에서 '공공의료 강화 및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공공의료대학) 설립 촉구와 불법의료 근절 및 의사인력 확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제공: 보건의료노조

'보건의료인력지원법' 시행...적정 의료인력 확충 국가 책임으로 

한편 보건의료인력의 원활한 수급과 근무환경 개선, 우수 보건의료인력 양성 등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이 지난달 24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은 보건의료인력의 구체적인 유형을 규정해 향후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 실태조사 등 정책 추진 때 고려해야 할 보건의료인력의 범위·대상 등을 명확히 했다.  특히 보건의료인력 정책 방향, 인력 양성과 공급, 적정 배치, 근무환경 개선·복지 향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도록 근거 규정을 담았다.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에는 정책목표 및 방향, 보건의료인력 수요 추계, 양성 및 공급, 면허·자격관리 및 교육·연수, 근무환경 개선 및 복지 향상, 지역별·보건의료기관 유형별 보건의료인력의 적정 배치, 의료취약지 및 공공의료분야의 보건의료인력 양성 및 배치 등이 포함된다.

복지부는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 및 중장기 수급추계 연구'용역을 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진행 중이며, 보건의료인력지원법에 따른 첫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을 내년 하반기에 발표할 계획이다.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의 시행은 그동안 개별병원의 경영 논리에만 맡겨놓았던 적정 인력확충을 국가가 책임지고 추진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 법의 시행을 계기로 의료기관이 적정 의료인력을 확충해 의료인의 삶의 질과 환자안전을 모두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근본적인 의료체계 개편을 추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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