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권) / 박지원 지음 /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엮음 / 그린비 펴냄

여행에 관한 책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멋진 여행기를 한편 써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무렵부터 장거리 여행을 떠나면 여행에서 얻은 느낌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적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뉴욕-워싱턴으로 이어지는 동부, 오클라호마-콜로라도-그랜드 캐년으로 이어지는 남부, 배드랜드-옐로우 스톤으로 이어지는 서부, 슈페리어호를 한 바퀴 도는 북부로의 여행들입니다. 사진을 제대로 챙길 수 없어 그때 적은 여행기는 아직도 파일함에 감추어두고 있습니다. 그때 적은 여행기에서 한 대목 옮겨봅니다.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은 한 마디로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다. 정녕 이것이 인간이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조각품이란 말인가? 전망대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는 순간 그 현란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 절벽 아래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탑모양의 창조물들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게다가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서로 다른 색깔로 켜를 이루고 있고, 하나하나의 자태 역시 너무 섬세하여 언뜻 다보탑을 연상케 한다. 이것들이 흙과 바위로 만든 자연이 이룩해낸 경관이란 말인가. 한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파이우트(Paiute) 인디언들은 이곳을 꼭 붉은 바위가 사람처럼 서있다고 하여 ‘Red rocks standing like men in a bowl-shaped canyo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계곡에 서 있는 환상적인 색조의 'hoodoo'는 코요테에 의하여 돌로 변한 '전설의 인간들(Legend People)'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출발 전 준비과정부터 다녀와서 마무리할 때까지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도 읽는 맛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여행기를 맛깔나게 쓰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고미숙님 등이 엮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게 된 것은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눈물’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연암의 산문을 새롭게 조명한 주영숙님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에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외쳤다는 열하일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도대체 눈물보이기를 기피하던 조선의 선비가 통곡할 만하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가 하늘과 만나는 지평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좁아터진 우리 땅에 갇혀 살던 연암이 요동땅의 드넓은 들판을 처음 보면서 생뚱맞아 보이는 통곡을 생각한 것은 바로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 터뜨리는 울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오니 참으로 시원한 마음이 들어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한번 펼쳐내는 것이라고 해석한 연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상권, 136쪽)” 누구나 이런 곳을 만나게 되면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동이 눈물로 쏟아져 내리게 될까요?

연암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풍속, 시문 등 다양한 방면에서 통달하고 있음은 <열하일기>의 전편을 걸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투전과 같은 잡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에는 경계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잠시 우리나라 고역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사책에서 배운 대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위치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위치했다는 주류 역사학계가 판단은 틀렸고 요동반도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새로운 주장을 읽으면서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200년도 넘은 그 옛날 연암이 이미 요동을 지나면서 한사군이 요동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점을 고증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무왕 대무예가 일본의 성무왕에게 보낸 글에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지킨다.’고 쓴 부분이 있다. 이로써 추정해보자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겹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디 우리 영토 안에 있었다는 걸 더욱 명확히 증명할 수 있다.(상권, 98쪽)” 한사군이 평양부근에 있었다는 주장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패수의 위치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연암시절의 선비들 역시 평양부근의 패수를 지목하는 경향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암은 옛날 중국 사람들은 요동 동쪽의 강을 모조리 ‘패수’라 불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대적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연암은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마땅히 이를 수용하여 본받아야만 한다.(상권 234쪽)’고 하였습니다. 사방이 수천리나 되는 우리나라의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곤궁한 것은 수레길이 없고 수레를 끌 말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대체로 목축이 자리 잡지 못한 탓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으로 가장 큰 곳은 탐라 한 곳뿐이다. 그곳의 말들은 모두 원 세조때 방목한 종자로, 사오백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용매나 악와에서 나는 준마들이 과하나 관단 같은 조랑말이 되고 말았다.(하권, 282쪽)” 옛날 우리나라에서 나는 과하마가 전투에서 유리한 점이 있다고 배웠던 것과는 달리 조선조에 들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이는 주자학을 국치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실용을 무시하고 이론과 의례에 지나치게 매달린 치세방식이 나라를 유약하게 만든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고구려 때는 수와 당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대군을 막아냈던 우리나라가 조선조에 들어 왜란과 호란으로 전국토가 짓밟힌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잘 생각해볼 일입니다.

연암을 비롯한 당시 우리 선비들의 자연철학의 경지는 놀랄만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하에 머물 때 태학에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나눈 필담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지구가 둥글고 움직인다는 지전설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하여 그때까지 천체운동의 원리로 확고하던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을 뒤집는 변환을 이루었던 것이 1543년입니다. 연암이 연경을 방문하던 때와 벌써 200년 이상 차이가 있고, 그때는 이미 서양 사람들이 연경까지 왕래하고 있던 터라서 그들을 통해 전해진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접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연암의 친구 홍대용의 스승이라고 하는 김석문이라는 사람이 당시보다 100여년 전에 삼환부공설을 제창하는 등 천동설을 부정하고 있었다고 하니 독자적 사유의 결과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최근에 [북소리]에서 소개한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에서 저자 정영숙 시인은 “샤를 보들레르 이래 시인은 언제나 화가의 암호를 풀어내는 해독자였고, 화가 역시 시인의 정신을 형상화하는 재현자였다. 시인은 시 안에 그림을 넣어두고, 화가는 그림 속에 시를 숨겨둔다. 마치 암수한몸과 같다.”라고 한 박제천 시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암은 벌써 이런 점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암은 심양에 가까워지면서 흩어져 있는 불탑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보면서 ‘어부가 손을 들어 강성이 바로 저기매요 하니(漁人爲指江城近) 뱃머리에 솟은 탑이 볼수록 더 높아지네(一塔船頭看漸長)’라는 옛시를 인용하면서 “대개 그림을 모르면서 시를 아는 이가 없는 법이다. 그림에는 농담(農談)의 구별이 있으며, 또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다. 이제 이 탑의 모양을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게 알겠다. 옛사람이 시를 지을 때 반드시 그림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으리라는 것을...(158쪽)”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후에 의문이 가는 곳도 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 부근에 있는 강영태의 집을 방문했을 때 화분에 심겨진 무화과를 보았다고 적은 부분입니다. 아열대성 과수인 무화과는 어린 나무 때는 추위견딜성(耐寒性)이 매우 약하고 큰나무가 되어서도 최저(最低) -9℃가 한계이므로 전남 영암 목포 등 남부지역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습니다. 온실이나 비닐하우스가 보편화된 지금도 북쪽 지방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하는 것이 쉽지 않을 터인데 연암이 살던 시절의 요동지방에서 열매가 달린 무화과나무를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을 믿어도 될까요?

또한 책문을 떠나면서 자주 비를 만나고 강물이 넘쳐 발이 묶이는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사신단을 몰아붙이는 정사 박명원의 독촉 때문에 몇 차례 연경을 다녀온 하급관리들이 ‘이 지독한 더위에 이렇게 쉴 참을 거르다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불만을 쏟아냈지만, 죽기 살기로 달려서 마침내 8월 초하룻날 연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연암의 여행기를 보면 연경에 이르는 동안 볼거리를 챙겨 돌아본 느낌을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여유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일정은 험난한 경로임에도 일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입니다. 연경에서 열하로 떠나는 여정을 기피하는 일행도 적지 않았지만, 당시 조선에는 열하까지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점에 끌려 정사와 동행하게 된 연암은 길이 험한 만큼 얻는 것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백하를 지난 다음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넌 연암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다. 명심(冥心-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 한 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물을 건넜지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175쪽)” 낮에는 시각으로 보는 위험이 캄캄한 밤에는 청각으로 듣는 위험으로 바뀌더라는 점에서 결국 근심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이 태평해졌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서 뚜렷해지자 눈앞에 크고 작은 것에 개의치 않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강물에 대한 연암의 생각은 연암협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듣던 시냇물소리로 거슬러 올라가, “깊은 소나무 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거문고가 우조(羽調)로 울리는 듯한 건 슬픈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174쪽)”라는 생각으로 정리해내고 있습니다. 즉 외부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자극이 마음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 최근에 정립되고 있는 뇌과학적 견해를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다. 옛적부터 내려온 정례와 규칙을 주장하여 인용함은 싸움터의 진지를 구축함이요, 글자를 묶어 구절 만들기, 구절 모아 문장 이루기는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주영숙 편저, 눈물은 배우는게 아니가, 195쪽)”라고 해서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한 연암의 글솜씨의 백미라 할 <열하일기>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1780년으로 날아가 연암과 함께 연경을 거쳐 열하에 이르는 장도를 경험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