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 버트란드 러셀 지음 /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펴냄

얼마 전 [북소리]를 통해서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교수가 1920년 3월부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내용을 묶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철학공부에 관심을 붙이려면 기본을 먼저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책읽기입니다.

가세트 교수가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유의 대상을 우주로 확대하면서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 철학과 물리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의 차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인식을 다루고 있는 물리학은 물질이라는 가시적이며 현실적인 대상과 직면하는 반면 철학은 연구대상이 되는 우주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철학자는 존재하는 일체의 전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성 속에서 각 사물의 위치, 역할, 지위와 같은 각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 양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세트 교수의 철학 강연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가라앉고 있는 스페인의 사회적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었고 합니다. 즉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스페인의 지성들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를 통하여 국민들의 의식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가세트 교수의 강연은 특히 철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되었고 합니다. 안밖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가세트 교수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북소리] 리뷰가 어려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철학공부가 부족하다 보니 쉽게 설명하는 방법을 아직 깨치지 못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또 다른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버틀란트 러셀(1872-1970)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입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와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러셀은 수학자, 철학자이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그리고 사회비평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고틀롭 프레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을 창시한 철학자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The Problems of Philosophy”라는 원저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한 제목이기 때문에 저자의 집필의도가 정확하게 담겼는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현상과 실재에 대한 철학적 접근방식을 논하고 철학적 지식의 한계와 가치를 논하고 있는 점에서 본다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책내용에 충분히 부합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나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철학의 문제들만을 다루었다.”고 서문에 적은 것처럼 철학적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는 문제를 제외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공부에 입문한 사람이 개념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러셀은 “이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지식이 이 세상에 있는가?(7쪽)”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쌓아올리게 될 지식의 성격을 정의하기 위한 말머리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사유가 출발하는 기본적인 질문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과 사물이 사실상은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현상(現狀)과 실재(實在)’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셈입니다. 러셀은 근대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의 체계적 회의법-의심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밝혀질 때까지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의심한다-을 인용하면서 “한 본능적 신념이 다른 본능적 신념과 충돌하지 않는 한 그것을 배척할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본능적 신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그 체계 전체를 받아들일 만하다.(30쪽)”고 하였습니다. 즉 철학은 다른 방식으로는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경우에도 궁극적 실재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세트 교수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처럼 러셀 역시 “자연과학은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무든 자연현상은 운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빠져 있다.(32쪽)”고 자연과학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저술하던 무렵 나왔던 광양자설-1905년 광전 효과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제창한 가설-로 인하여 그동안 빛의 성질을 완벽하게 설명해오던 파동설의 위상이 흔들리던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러셀은 “과학적인 물질세계에는 색깔과 소리 등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시각이나 촉각을 통해 알게 되는 <공간>도 없다.(33쪽)”고 주장하였는데, 논리적 추론을 통하여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입증할 방법을 찾아내는 과학 분야가 추구하는 목표가 거시적 대상으로부터 미시적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러셀이 물질의 존재와 본성에 이어 관념론을 논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지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관념을 통하여 인식하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직접지(直接知)에 의한 지식과 기술에 의한 지식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직접지란 직접경험을 통하여 얻는 지식을 말하며 기술에 의한 지식은 타인이 경험하고 남긴 기술을 읽고 얻은 지식을 말합니다. 러셀은 경험에 의하여 획득한 직접지는 기억을 통하여 축적된다고 하였고, 기술에 의한 지식은 경험에 의해 확인될 수도 없고 논파될 수도 없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신념에 바탕하고 있는 만큼 우리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러셀은 모든 지식은 경험에 의해 이끌어지고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어떤 지식은 선천적이라는 주장에 대하여도 가설적인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존재를 주장하는 모든 지식은 경험적인 것으로, 존재에 대한 선천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거나 존재할지도 모를 것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현실적 존재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사물에 대해 미리 어떤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보인다고 하면서도 보편적 세계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2 2는 4’라거나 더 나아가 ‘삼각형의 각 변에 그것과 대립되는 정점으로부터 수선(垂線)을 긋는다면 세 개의 수선은 한 점에서 만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어 선천적 지식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러셀이 인용하고 있는 일반적 명제라는 것도 그와 같은 사실을 먼저 깨달은 누군가가 남긴 기술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에 의존하여 알게 된 것이며, 물체의 색깔과 같은 것도 사실은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합의에 의하여 정해진 용어가 전승되어 온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경험에 의한 직접지가 기억에 의하여 축적되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 우리는 이미 기억의 불확실성은 물론 기억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만, “기억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직관적 판단 일반의 신빙성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한다.(136쪽)”고 적고 있어 러셀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하여 고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니얼 샥터 교수는 <기억 일곱 가지 죄악>을 통하여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기억이 일으키는 대표적인 오류로는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귀인(誤歸因),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 등 7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기억의 오류는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며 누구에게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지식의 속성으로 돌아가서 러셀은 우리들의 지식의 원천을 개관하여 사물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구분하고, 각각은 직접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이 있고, 직접지라고 하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 지식은 특수인가 혹은 보편인가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기술에 의한 지식이라고 하는 사물에 대한 파생적 지식은 직접지와 진리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다고 하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지식을 <직관적>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자명한 것으로 감관에 주어지는 것을 진술하거나, 추상적 논리 및 산수적 원리, 그리고 어떤 윤리적 명제 등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러셀은 사물에 대한 지식과는 달리 진리에 대한 지식에는 대립되는 것, 즉 <오류>가 있다는 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인 진리를 믿는 것처럼 참되지 않은 진리, 즉 허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문제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일사분란하게 정리될 수 없어 각자의 신념에 따라 진리와 허위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천안암 침몰사건 등에서 전문가들조차 갈라 서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 것처럼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사회현상입니다.

러셀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신념이 참된 것으로  되기 위해 신념과 사실 사이에 있어야 하는 대응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1) 진리가 대립적인 것, 곧 허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2) 진리를 신념의 성질로 만들고, 3) 진리를 신념과 외부의 사물의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성질로 만드는 진리론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굳게 믿는 진리가 참인지 오류인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즉 최고도의 자명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개연적 의견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많은 과학적 가설들이 정설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가설을 설명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철학적 가설 역시 개연적 의견으로 출발하여 정합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가세트 교수가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유의 대상을 우주로 확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러셀은 철학적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에서 우주 전체에 대한 지식은 형이상학에 의하여 획득될 것 같지 않다고 토로하면서, “비교해부학자가 한 개의 뼈를 보고 전체적으로는 어떠한 동물이었는지를 아는 것처럼, 헤겔에 따르면 형이상학자는 실재의 한 조각을 보고 이 실재가 전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셀은 사고의 세계에서나 사물의 세계에서도 본질적인 불완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의 세계에서도 추상적인 또는 불완전한 개념을 검토하는 경우, 이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잊으면 우리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사실 비교해부학자가 단지 한 조각의 뼈를 가지고 어떤 동물의 것인지 명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앞서 러셀이 자연과학의 한계를 넌지시 내비쳤다고 적었습니다만,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과학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지식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지식과 다르지 않다. 철학에는 열려 있으나 과학에는 열려지지 않는 지혜의 특별한 원천은 없으며 철학에 의해 획득된 결과는 과학으로부터 획득된 결과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철학을 과학과 다른 학문으로 만드는 철학의 본질적 특징은 <비판>이다.(176쪽)”이라고 정리하여, 철학은 과학과 일상생활에서 채용되는 원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비정합성을 발견할 수 없을 경우에 이 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러셀은 철학적 가치를 철학이 추구하는 불확실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철학은 스스로 제기한 의심에 대해 확실성을 갖고 무엇이 참된 대답인가를 말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들의 사고를 확대하고 관습의 전제로부터 해방시키는 많은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다(183쪽)”는데 가치를 두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