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자율경쟁 원리가 작동하는 시장이라면 양질의 상품이 저질의 상품을 배척하고 선택받아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당연한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가 있다. 저질의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이익이 더 클 경우 배척당하는 것은 오히려 양질의 상품이다.  

의료시스템에서 지금 이 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합리적인 시장경쟁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저급한 의료공급체계가 만연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의료체계 전반에 걸쳐 16세기 유럽의 저질 주화가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형병원에서 만연하는 PA(Physician Assistant, 진료보조인력) 인력이다. 당초 PA는 급속한 병상 확충으로 거대해진 대형병원들이 부족한 의사 인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도입됐다. 특히 기피과로 전락해 전공의를 확보하지 못한 외과계열을 중심으로 경력 많은 간호사를 수술실 보조인력으로 활용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그나마 초기에는 수술실을 중심으로 음성적으로 활용되던 PA 인력이 이제는 전공의 인력을 밀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흉부외과 등 일부 전공의 지원 기피과에서는 PA 제도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한병원협회도 여기에 가세했다.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PA 합법화 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부족한 의사인력을 인건비가 싼 PA로 대체하려는 대형병원들의 이익추구리 앞에 전공의 수련기관이란 타이틀은 마냥 거추장스럽다. 

급기야 전공의들은 수술실에서 밀려나고, 제대로 임상술기를 배울 수 있는 수련교육 기회마저 빼앗기고 있다. 오죽했으면 “책으로 임상술기를 배웠다‘는 말이 나올까 싶다. 초음파 검사나, 내시경 시술 한 번도 못해본 내과 전문의와 맹장수술도 한번 못해본 외과 전문의가 배출된다는 탄식이 과장된 게 아니다. PA라는 ’악화‘가 전공의라는 ’양화‘를 임상현장에서 배척한 셈이다. 인건비 절감이란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양질의 의료인력 양성이란 수련병원 본연을 역할을 내팽개친 과오는 결국 저수계 체계의 고착화를 불러올 것이다. 무엇보다 제대로 수련 받지 못한 전문의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야할 환자들이 가장 큰 피해자다.  

‘저수가-저부담-저급여’ 체계 역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사례다. 속전속결로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욕심이 보험료는 적게 내고, 보장성은 낮은 부실한 사회보험제도를 만들어 냈다. 보험료 부담이 낮다보니 재정은 늘 부족하고, 의사와 병원에게 줘야할 의료수가 역시 낮게 책정될 수밖에 없었다.

3저 시스템은 10여년 만에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완성할 만큼 효과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적정수가-적정부담-적정급여’가 들어설 자리가 사라졌다. 의료계가 아무리 저수가 체계 개선을 외쳐도 이미 고착화된 3저 시스템을 떨쳐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레 포기한 의료계가 저수가 체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박리다매 식의 ‘3분 진료’와 비급여 진료, 부대사업 확대로 눈을 돌렸다. 환자들은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을 민간의료보험으로 메웠다. 이런 변칙적인 구조가 지난 수십년간 견고하게 구축됐다. 이제는 오히려 ‘적정수가-적정부담-적정급여’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불순하게 들릴 정도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에 유통되는 16세기 유럽의 저질 주화가 어디 이뿐이랴. 의학적 판단에 따른 치료보다 건강보험 재정에 맞춰 치료할 것을 요구하는 급여기준도 일종의 ‘악화’다.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오리지널 신약을 개발하기보다 짧은 시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개발할 수 있는 제네릭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신약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제네릭을 앞세우다보니 리베이트를 통해 판매를 촉진하고, 굳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신약을 개발해야 할 동기를 시장에서 몰아냈다. 

결국, 16세기 유럽에서는 불순물이 잔뜩 섞인 은화가 순도가 높은 은화를 배척했다. 우리의 의료시스템이 지금 이런 길을 걷고 있다. 양질의 의료서비스와 의료인력, 의료산업이 제대로 대접받고 유통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저질 의료서비스의 유통과 국민건강의 악화란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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