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문학 / 장석주 지음 / 민음사 펴냄

지난 4월 17일 뉴스매체들은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의 결승선 부근에서 폭발물이 터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하면 1947년, 막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참석한 서윤복선수가 1위로 골인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세 선수가 1위부터 3위를 독식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친숙해진 경기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마라톤에는 직접 참여해보지 못했지만, 지난 해 마침 보스턴마라톤 결승점이 위치한 보일스톤 거리 근처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덕분에 역사적 현장에 서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남달랐고, 휴일 보일스톤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행렬을 지켜보면서 보스턴시민들의 뜨거운 마라톤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테러의 주체가 오리무중에 싸인 채 미해결사건으로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전자시대를 맞아 수사정보의 원천이 다양해진 덕도 있었겠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수사협조가 크게 기여했다는 것 같습니다. 범인은 러시아의 체첸에서 이주해온 형제인데 체포과정에서 형은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동생 역시 총상을 입은 상태라 범행동기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격단체가 개입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혹시 미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쌓인 심리적인 불안감 등이 범행의 원인(遠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부 국가에서 구성원들의 불확실한 삶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인적 유동성이 증가한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을 생각합니다. (모두스 비벤디). 바우만은 최근 들어 국가 간의 거리가 좁아지고, 구성원들의 유대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소멸되어 감에 따라 사회적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집단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국경을 넘어서는 국제적 난민이 폭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면 역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일상의 인문학>의 서문에서 장석주님은 이처럼 불안과 공포와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이야말로 위험한 사회가 아니겠느냐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 모두는 사냥꾼이다. 또는 사냥꾼이 되라는 말을 들으며,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한다.(모두스 비벤디, 160쪽)”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미 세상은 사냥꾼들의 정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사냥꾼의 무리에서 이탈해서 사냥을 그만두는 순간, 우리는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짚었다면 해답도 찾았을 터. 장석주님이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책읽기입니다.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책으로 천년을 사는 법)’는 구절을 인용하여 “살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일상의 인문학, 7쪽)”고 하였습니다. 자신 역시 책읽기와 더불어 사유의 싹이 트고 풍성하게 자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당장 밥이 나오는 것을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삶을 살찌우고 풍요하게 만드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해주려는 말씀입니다.

앞서 안상헌님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이 문학, 역사, 철학을 묶는 인문학 분야의 책을 어떻게 읽어 삶의 본질을 찾아들어갈 것인가를 안내하는 안내서였다고 한다면, 오늘 소개하는 장석주교수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게 생각하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주제의 중심이 되는 책과 함께 관련이 있는 몇 권의 책을 읽어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적 책읽기의 심화과정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일상’이란 일상범백사(日常凡百事)를 줄인 말입니다. 즉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하루가 쌓여가는 일상이기에, “흔하고 하찮은 것, 더러는 의미를 머금지 못한 채 날것의 덧없음으로 뒹구는 그 무엇이다.”라는 저자의 정의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속에서 남들과 다른 무엇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생명의 기하학이 역동한다.(8쪽)” 하루하루의 의미가 달라져 보이지 않습니까? 삶의 기본단위가 되는 일상이 없다면 당연히 삶도 없을 것이며 존재의 의미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50개의 주제에 대한 생각을 책을 꼬투리로 펼치고 있습니다. 자연히 특정한 책의 리뷰가 아니라 특정 주제에 관련된 책에서 건져낸 화두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생각을 에세이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저자가 주제를 이끌어내는 쉰한 권이나 되는 책들 가운데 김훈의 <칼의 노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만을 읽어보았을 뿐입니다. 작가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관심이 가는 주제를 이끌어내고 있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주문했습니다.

첫 번째 화두 ‘기다린다는 것’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대학시절 연극부 활동을 할 때 몇 차례 공연을 통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는 (…) 늘 오늘의 괴로움이 끝나는 내일을 기다린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13쪽)”고 적어 기다림을 인간이 타고난 숙명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느라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서있는 시골길 위를 떠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주고받는 의미없는 대사를 끌어왔을 것입니다.

저자와 겹치는 책읽기가 별로 없었던 탓에 정확한 비유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저자가 추출해낸 사유는 같은 책을 읽고 제가 느낀 점과는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고생을 사서하는 여행에서 환희를 느낀다는 보통의 설명과 함께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행은 장소들의 숭고함을 들이키는 문화적 행위다.(140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간단하게 적거나, 책내용을 요약하여 전하는 수준의 리뷰에 머물고 있는 저와는 차원이 다른 글쓰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느낌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문학공부의 심화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책읽기는 궁극적으로 글쓰기로 이어져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읽기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에세이는 제가 가야할 글쓰기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을 인용한 서평쓰기에 대한 에세이에 주목하게 됩니다.

다양한 방식의 서평쓰기가 있습니다. 서평을 저널리즘의 한 형태로 보는 경향도 있는데,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만 해도 과거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서점을 찾아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살펴 책을 고르곤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소개되는 서평이나 인터넷 리뷰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서평을 읽고 책을 고르게 되면서 누군가의 서평을 참고하여 책을 고르게 됩니다.

저자는 월터 카우프만의 책에서 “서평은 정치다.”라는 문장에 꽂혔다고 합니다. 이유는 “서평은 어떤 책이 그 책값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주고, 그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108쪽)”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서평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문화적 신뢰성에 비해 그 내용이 부실하다. 그런데도 그 부실함이 들춰지지 않거나 추문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서평만 읽고 정작 그 책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109쪽)”고 잘라 말할 정도로 일반적인 서평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가혹하다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칭찬의 관용구를 남발하는 서평가 보다는 까칠한 태도로 저자를 신랄하게 꼬집고 괴롭히는 서평가의 글을 읽을 때가 훨씬 더 즐겁다는 고백도 서슴치 않는 것을 보면 작가로서 저자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임이 분명합니다. 저의 책에 대한 비판적인 서평을 읽으면서 작가의 본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된 리뷰를 적었다고 생각한 저와는 분명 다른 차원에 사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제가 판단하기에 오류투성이의 내용을 담은 책이란 생각에 정치적(?)으로 톤을 상당히 낮춘 서평을 쓴 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서평에 대하여 해당출판사가 서평을 내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경우도 있었고, 작가 자신이 서평을 올린 저의 블로그에 스토커 수준으로 덧글을 달면서 비난하던 경험도 있으니 역지사지(易地思之)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복적 사유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살피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삶에 대한 작가의 단상에서 제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일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열광적인 독서광이었던 발터 벤야민은 문학․정치․영화․미술․철학 어느 하나에 고착하지 않고 그것들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중심에서 현대성의 의미를 건져 올렸는데, 예를 들면 철학과 시를 뒤섞고, 정치와 형이상학, 신학과 유물론이라는 재료를 비벼 독자적인 사유세계를 펼쳐냈다는 것입니다.(238쪽) 하지만 그의 글들은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가운데 1940년 불과 48세의 나이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철학적 사유들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때이른 죽음으로 파리에 대한, 파리를 위한 철학적 대기획은 미완으로 그치고, 남은 것은 지식 유목민의, 변화하는 20세기 사회와 문화 지형에 대한 사유의 균열과 협로, 포식의 흔적들뿐이다.(239쪽)“고 적어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의과대학시절 면역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던, 의학에 대한 저의 꿈은 지극히 한국적인 장애를 만나 병원병리학으로 궤도수정을 하고, 신경병리학, 특히 퇴행성 뇌질환으로 좁혔던 관심은 너무 일렀던 탓에 기획을 펼칠 곳을 찾지 못하고 접어야 했으며, 대안으로 시작했던 독성병리학 역시 아직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한 우리나라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지금까지의 제 삶은 의학의 노마드로 살아온 셈이라고 자위해야 할까요?

노마드(nomad)는 ‘유목민’ 혹은 ‘유랑자’로 번역되는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철학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노마디즘는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장석주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라는 부제처럼 인문학공부를 심화학습하는 과정의 책으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어 소개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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