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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화의 Book소리]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천사죽어가는 자의 고독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 김수정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심지어는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까지도 언젠가는 소멸될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열규 교수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에서, 우리네 선조들이 높게 쳐준 ‘갖추어진 삶’의 맺음, 즉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면, 안채 안방 혹은 안사랑에서 이른바 ‘와석종신’해야 하고, 임종자리에는 자식이 빠짐없이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현대의학이 발달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심장이 뛰도록 하기도 합니다만, 돌아가시는 분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임종의 순간을 지키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처럼 고독사(孤獨死)에 대한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 ‘고독사’는 정의가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세태가 변해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외부에 알리기를 원치 않거나, 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는 것인데, 이는 죽은 이가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사회 또한 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기대수명이 지난 세기에 비하여 획기적으로 늘고 있습니다만, 역설적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교수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죽음을 임종의 순간에서 노화가 일어나는 과정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고독하게 되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병약해지고 노쇠해지는데, 서서히 쇠락해간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삶으로부터 격리시켜 점차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지만 정작 그 사람은 여전히 사람들이 주위에 남아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떠나갈 때 절실하게 원하는 도움과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들을 멀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고독한 가운데 죽음을 맞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은 문명화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변해온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유래한 지옥이나 천국 같은 내세적 관념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연속성의 신화를 만든 시기로, 사람이 죽음에 대처하는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는 종교적 영향이 줄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서, 두려운 죽음을 가능한 한 멀리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억압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로서 심지어는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타인의 죽음과 나를 분리시킴으로서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타인과 나의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가장 최근 일어나고 있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로운 태도입니다.

죽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 죽음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의지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태초의 낙원에서 영생하는 존재였던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인데, 살아가는 동안 신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내세가 보장된다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등 사람들의 삶은 고단하고 짧았으며, 삶을 위협하는 이러한 위험요소들은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종교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위안요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중세 유럽사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고 전염병이 강력한 힘으로 전 유럽을 휩쓸었다. 사람들은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했다. 성직자와 탁발승이 이 공포를 더 강화시켰다.(21쪽)” 니체는 <반그리스도교>에서 저자의 이러한 견해가 보다 더 오랜 과거에 성립된 것임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평화롭던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믿던 유대교의 신 야훼는 힘과 기쁨과 희망의 상징이었고, 신을 숭배하는 것은 민족의 강성함과 계절의 변화, 농장에서 얻은 모든 복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인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황폐해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 되자 유대교의 성직자들은 ‘모든 행복은 신의 은총이며, 모든 불행은 신을 믿지 않은데 따른 벌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 외, 479쪽)’라고 신도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어온 신’을 ‘조건에 의하여 제약된 신’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재판과 같이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추방, 투옥, 고문, 그리고 화형과 같은 끔찍한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중세와는 달리 현대에 들어 발전된 사회에서는 초자연적인 믿음에 기대어 삶을 위협하는 요소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려는 경향은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었던 상황들이 의학의 발전으로 설명이 가능해지고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진 덕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집단 간의 충돌은 점차 심화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엘리자 그리즈월드는 <위도 10도>에서 특히 남북 위도 10도 사이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은 영토문제, 물과 석유와 같은 자원을 둘러싼 이해의 충돌 그리고 상대종교의 공격적인 포교에 자극을 받아 대응차원의 포교가 진행되가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지리아의 종교지도자들이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어 지구상의 종교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희망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종교의 영향이 줄어들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것인데, 하나는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의 본질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과 현대국가의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국가가 폭력을 효율적으로 독점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개인의 삶의 안전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던 죽음이 꺼리는 대상으로 변환되고, 자기불명성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강화시키는 피드백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죽음의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커지면서 죽음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에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점에 저자는 착안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31쪽)”

최근 개봉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로 향했던 키티의 마음을 다시 붙드는데 성공한 레빈은 키티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빈이 자신의 의구심을 풀어내는 계기는 바로 형 니콜라이의 죽음입니다. 키티는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는 니콜라이를 스스럼없이 깨끗이 닦아주고 따듯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에누리 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것, 그것은 신체적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것과는 별도로, 남아 있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37쪽) 사람들이 점차로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물러서 있게 되고 죽음에 대하여 침묵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짧게 요약한 것처럼 타인과의 죽음에 거리를 두어 죽음에 대한 연상이 자신의 죽음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는 잠재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어가는 사람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상을 저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산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심리적 현상으로 설명하지만, 사회의 발전에 따라 등장하게 된 개인화와 자아인식의 발전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죽어가는 과정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의 세계, 그것과 연결된 독특한 기억, 나만의 감정과 체험, 나 자신의 지식과 소망 등을 오롯이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의 상실감이다.(73쪽)” 어떻게 보면 죽은 자에게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며, 오히려 산 자에게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의 생명을 끊는 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살아있는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은 안타까운 일인 것 같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서구문명의 문명화과정을 정리해온 저자가 죽음에 대한 서구인들의 의식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옮긴이가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살아있는 자와 죽어가는 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죽음을 분석한 것인데, 저자는 현대로 들어서면서 죽음이 위생화되는 과정이 살아 있는 자의 권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죽어가는 자와 노인을 격리시킨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일대학교의 셸리 케이건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영혼의 존재와 영생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반드시 죽는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무게를 실어 죽음과 삶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앞서 저자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온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유형 가운데 마지막,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타인과 나의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가 주목하는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구체적인 고민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라포르시안  webmaster@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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