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살리아와 이탈리아 정신보건 혁명 다룬 <자유가 치료다> 발간

[라포르시안] 정신과 진료를 받을 경우 국제질병분류 기호에 따라 F로 시작되는 병명이 진단서에 기록된다. 지난 수십년 간 우리나라에서 'F코드'(정신 및 행동장애)는 사회적 배제와 격리라는 '낙인 효과(Stigma Effect)'로 작용했다.

지난 1996년 12월 정신보건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국내 정신보건정책은 F코드 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배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보호자의 동의를 근거로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키고, 강제입원된 환자를 상대로 한 인권침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정신보건법이 제정된 지 20년 만인 2016년 5월 기존 법에서 강제입원 등의 규정을 전면 개정한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정신건강복지법)이 마침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의 핵심은 강제입원 요건을 강화해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이들에 대한 복지서비스 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마침내 정신질환자를 사회로부터 배제하고 격리하는 정신보건정책의 유효기간 만료와 함께 '탈시설화'의 첫 걸음을 뗀 셈이다.

정신건강복지법은 지난해 5월 30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법의 시행을 놓고 '정신질환자 퇴원 대란' 우려가 커졌다. 정진질환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함께 정신질환자를 '예비 범죄자'로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질환자를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그 속에서 치료하고 재활을 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속에서 지지체계를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국내에서 정신질환자의 탈시설화를 위한 정책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가장 개혁적으로 탈시설화를 추진한 이탈리아의 사례를 소개한 책이 나왔다.

‘자유가 치료다(La libertà è terapeutica)’라는 제목의 이 책은 1978년 바살리아 법을 통해 전국의 공공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확립한 이탈리아의 사례를 다루고 있다. 책의 제목인 '자유가 치료다'는 1970년대 이탈리아 정신보건 개혁의 근거지가 되었던 산지오바니 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들이 외쳤던 구호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프랑코 바살리아가 고리찌아 정신병원장으로 취임한 이후부터 1978년 바살리아 법을 통해 전국의 공공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확립해 '정신병원 없는 나라'가 되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1960년 초반 이탈리아에는 수만 명의 정신질환자가 전국에 분포된 정신병원에 비자의(강제) 입원된 상태에서 장기간 구금에 가까운 수용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무렵 이탈리아 북부 고리찌아 지역의 정신병원에 원장으로 임명된 바살리아는 구금 생활이 환자들의 치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병세를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신병원 개혁 운동에 뛰어든다.

고리찌아 정신병원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바살리아가 본 병원내 상황은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환자들을 결박하거나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의학적 효과도 검증되지 않은 전기충격요법, 인슐린 쇼크 요법 등이 시행되고 있었다. 바살리아는 그런 정신병원 안에서 환자들의 상태가 더 나빠진다고 믿었다. 정신병원에 환자를 수용하는 목적이 '훈육과 처벌'에 다름 아니었다. 바살리아는 수용소와 같은 정신병원을 완전히 폐쇄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1971년 산지오바니 병원으로 옮긴 바살리아는 정신병원 개혁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이 병원의 내부 공간을 환자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를 했고, 병동을 둘러싼 장벽을 제거하고 병원의 문과 출입구도 개방했다. 나아가 병원 규모를 점차 줄이고 개방된 지역사회 개념으로 재구성했다. 1973년 산지오바니 병원의 입원환자들이 만든 '마르코 까발로'라는 푸른색 목마는 이탈리아 정신보건 개혁의 상징물이기도 한다.

1973년 산지오바니 병원의 입원환자들이 만든 '마르코 까발로'. 사진 출처: 건강미디어협동조합
1973년 산지오바니 병원의 입원환자들이 만든 '마르코 까발로'. 사진 출처: 건강미디어협동조합

바살리아의 지속적인 정신보건 개혁 노력으로 결실을 맺은 '바살리아 법(법률 제180호 )'은 정신병원의 폐쇄를 통한 탈시설화를 핵심으로 한다.

바살리아 법의 실행에 따라 이탈리아는 공공 정신병원이 모두 폐쇄되고 이 곳에 수용돼 있던 정신질환자가 사회로 나오게 된다. 바살리아 법 시행 이후 정신질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하면서 조화롭게 살아 갈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이 책은 바살리아 법 시행 이후 지금에 이르는 40여 년 간 이탈리아 정신 보건 개혁 과정도 추적하고 있다.

한국이 정신건강복지법 시행 이후 수많은 논쟁을 초래한 것처럼 이탈리아에서도 바살리아 법 시행 이후 비슷한 논란이 일었다. 오랜 시간 격리와 배제를 근간으로 한 정신보건 환경에서 지역사회 중심의 탈시설화로 전환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병원 폐쇄 이후 가정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을 생로 마감하는 환자도 생겼다.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갇히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바살리아 법을 '미친 법'으로 비하해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바살리아 법의 시행으로 정신질환자들이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정신질환자에게도 인권이 보장돼야 하고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보장돼야 하며, 정신병원이 더는 이들을 격리하는 공간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탈리아는 정신보건센터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속에서 정신질환자를 위한 강력한 지지체계를 구축했고, 또한 국가 차원의 정신보건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 탈시설화 목표를 이뤄냈다.

저자인 백재중 녹색병원 호흡기알레르기내과 과장은 책 속에서 "정신병원 없는 나라 40주년을 맞는 이탈리아는 정신보건 개혁의 세계적인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이탈리아 사례는 우리에게 대규모 정신병원이 없어도 정신질환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 병원 중심이 아닌 지역사회 중심의 정신보건 체계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라는 점, 정신장애인들은 병원에 격리되어 수용되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같이 부대끼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사실 등을 알려 준다"고 말했다.

■ 자유가 치료다(부제 : 바살리아와 이탈리아 정신보건 혁명)

백재중 지음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 175쪽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