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하나로' 의료비 해결 강조하면서 '실손의료보험 활성화' 정책 동시에 펴
"의료공공성과 의료산업 육성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욕심으로 모순에 빠져"

[라포르시안]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공약으로 건강보험 하나로 의료비 문제를 해결하도록 보장성을 확대하고, 민간 실손보험이 건강보험으로부터 받는 반사이익분만큼 실손보험료 인하를 유도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과 달리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추진에도 불구하고 실손의료보험 시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특히 금융당국이 새로운 민간의료보험 시장 창출을 위한 규제 완화에 팔을 걷고 있어 박근혜 정부 때 제기된 의료영리화 우려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새로운 민간의료보험 상품 개발이 가능하게끔 규제 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앞서 작년 11월에 헬스케어 서비스와 보험산업의 융․복합 활성화를 목표로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개발·판매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보험사가 보험계약자의 건강관리노력에 관해 측정·수집한 정보를 보관하고 보험요율 산출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보험사가 보험가입자의 동의를 전제로 당화혈색소는 물론 진료내용, 건강검진 수치 등의 진료정보는 물론 걸음걸이 수, 식습관, 숙면측정결과 같은 생활정보도 수집할 수 있다.

이렇게 측정된 자료를 근거로 보험계약자의 건강관리노력을 평가해 보험사고 위험이 감소하면 그만큼 보험료 할인 등의 혜택을 주는 방식의 새로운 보험상품 개발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개발·판매 가이드라인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한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다. <관련 기사: 박근혜 정부의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이 부활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민간기업이 건강관리기관을 만들어 관련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건강관리서비스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의료민영화 논란에 부딪혀 입법이 무산됐다.

박근혜 정부는 관련 법개정이 아니라 행정규칙에 불과하나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민간기업을 통한 건강관리서비스 산업 육성을 추진해 의료계와 시민단체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지난해 11월 금융당국이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개발·판매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을 때도 비슷한 우려가 제기됐다.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가이드라인이 말만 바뀌었을 뿐 박근혜 정부 때 발표한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이번 가이드라인으로 개인 건강정보와 질병정보를 고스란히 민간보험사와 IT기업이 수집, 이용할 수 있도록 합법화했다는 점"이라며 "그동안 시민사회단체가 크게 우려했던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정책을 넘어서 삼성, KT, SK, LG텔레콤 등의 통신재벌 및 구글앱 등 거대 IT 기업의 돈벌이에 대한 규제 완화 민원을 해결해 주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우려는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보험가입자의 편의를 증대한다는 명분으로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를 위한 '인슈테크(InsureTech, 보험과 신기술 결합) 활성화에 팔을 걷고 있다.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의 핵심은 바로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병원이 보험사 쪽에 관련 진료기록 등의 자료를 직접 전송하는 것이다. 지금은 보험 가입자가 병원으로부터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하는 방식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7월 31일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로 보험개발원에서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 서비스를 시연하고 보험업계, 핀테크업체 및 의료계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는 김연아 전 국가대표 피겨선수가 참석해 KB손해보험 앱 시연을 했다. 사진 제공: 금융위원회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7월 31일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로 보험개발원에서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 서비스를 시연하고 보험업계, 핀테크업체 및 의료계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는 김연아 전 국가대표 피겨선수가 참석해 KB손해보험 앱 시연을 했다. 사진 제공: 금융위원회

지난 31일 서울 여의도 보험개발원에서 열린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 시연 및 간담회에서 최종구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실손의료보험은 일상적인 의료비를 보장해 약 3,300만여명이 가입한 국민의 실생활과 밀접한 보험상품이지만 소비자가 의료기관에서 관련 서류를 직접 발급받아 보험회사에 제출해야 하는 불편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 시스템 도입 확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날 시연회에 참여한 교보생명과 KB손해보험 두 보험사가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 시스템 구축에 가장 적극적이다. 

교보생명의 경우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에서 블록체인을 적용한 본인인증 절차를 거쳐 가입자의 최근 병원 진료 내역 중 보험금 청구 내역을 고르기만 하면 보험금 청구가 완료되는 시스템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KB손보는 레몬헬스케어와 함깨 실손보험금을 간편하게 청구할 수 있는 ‘M-CARE 뚝딱청구’ 서비스를 세브란스병원에서 운영 중이다.

금융당국은 병원이 환자의 진료기록을 보험사에 직접 전송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명확하게 마련할 방침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의 경우 병원이 진료기록을 보험회사에 직접 전송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본격적인 확산에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법적 근거를 포함한 다양한 이슈에 대해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관계부처와 협의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를 다르게 보면 의료기관이 보험 가입자의 청구업무를 대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금융위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도 환자 요청에 따라 의료기관이 진료비 내역 등을 보험회사에 보내는 등 실손의료보험금 청구절차 간소화 정책 추진에 나섰다가 의료계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당시 의료계는 "환자들은 본인들이 보험사에 직접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으므로 실손보험 관련 문제를 의료기관에 항의하게 되고, 이는 결국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관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된다"며 "이런 정책이 추진되는 것은 의료비 통제를 위한 것이고, 보험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무엇보다 현재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실손의료보험 간편청구와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활성화는 이미 3300만명의 가입자를 두고 건강보험의 '보충형 사보험'으로 인식되는 실손의료보험의 역할을 더 확대하는 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실손의료보험 청구 분야에서의 인슈테크 활용은 실손의료보험이 국민의 의료비 위험을 보장하는 사적안전망 역할을 더욱 든든히 수행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앞으로는 소비자의 편의를 제고하고 보험회사의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는 인슈테크 혁신이 보험회사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당국의 이런 정책방향은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정책과 모순된다.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 같은 보장성 확대를 통해 '건강보험 하나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해결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와도 맞지 않고, 자칫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처럼 의료영리화 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문제인 정부에서도 명칭만 '4차 산업혁명'과 '규제혁신'으로 변경됐을 때 박근혜 정부 때 '창조경제'와 '규제완화'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각종 의료상업화 정책이 그대로 재추진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의료기기 분야의 규제혁신 방안이 박근혜 정부에서 마련한 보건의료분야 투자활성화 대책과 닮은꼴이었고,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갑자기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 활성화 필요성을 언급해 논란을 사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보면 지난 정부 때 보건의료 분야에서 벌어졌던 규제 완화 정책을 둘러싼 의료영리화 논란의 판박이다. <관련 기사: 文 정부 '의료기기 규제혁신' 대책, 박근혜 정부 규제완화 짜깁기했다>

한 보건의료 전문가는 "최근 보건의료 분야와 관련해 발표된 정책을 보면 문재인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어떤게 다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라며 "의료공공성과 의료산업 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욕심을 내다보니 보건의료 분야에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 방향성이 큰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고 꼬집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