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알랭 드 보통 지음 / 박중서 옮김 / 청미래 펴냄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쓴 <왜 고전을 읽는가>를 읽고 있습니다. 고전과 그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에 앞서 저자는 무려 열네 가지나 되는 고전의 정의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처음 읽으면서도 마치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데,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라는 다소 진부한 듯, 정곡을 찌르는 정의도 있습니다만,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한 첫 번째 정의는 가벼운 것 같지만 독자를 배려한 프로작가 다운  면모를 읽는 것 같습니다.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는 고전의 정의를 인용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해서 내놓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스완네 집쪽으로(1)>을 [양기화의 북소리]를 통해서 독자들께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국일미디어에서 나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을 때, 사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에서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이 신입생의 말에 공감하듯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책읽기에도 계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된 것은 앞서 소개한 리뷰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박완서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에서 읽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에서 다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신경과학 분야를 전공한 저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래 전 아내가 구입해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인데, 다른 책들을 읽는 사이사이에 짬을 내다보니 장장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슈들 가운데 제가 이미 알고 있어 익숙한 것은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만,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쉽게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북 같은 것을 읽고 시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생각은 얼마 전에 읽은 폴 벤느의 <푸코, 사유와 인간>을 통하여 푸코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알랭 드 보통이 전하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한 프루스트의 작품과 편지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첫 번째 주제,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등등의 제목들을 그런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칼비노가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라고 정의하고, 읽는 사람마다의 독특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고전인 만큼 작품에 대한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해설서 들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충고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작가의 원전을 읽을 수 있다면 최선이겠습니다만, 원전을 읽을 수 없다면 좋은 번역가의 번역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프루스트의 “어떻게 하면 시간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15쪽)”라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요약하였습니다. 당시 파리의 유력 일간지 <랭트랑지장>이 1922년 여름에 “지구가 갑자기 파멸하게 된다면 그 최후의 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변으로부터 끌어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는 베네딕트 스피노자의 미래지향적 모범답안을 떠올릴 것입니다만, 저는 최근에 읽은 <내 몸은 내가 지킨다>에서 “내일 죽는다 해도 사과나무는 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최명기 원장의 주장에 관심이 끌리고 있습니다. 지구가 파멸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잊지 않고 루브르의 새로운 전시실을 방문할 것이고, X양의 발치에 몸을 던질 것이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것(11쪽)”이라는 같은 맥락의 프루스트의 답변은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한 가지 슬픈 일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라고 한 프루스트의 동생 로베르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국일미디어판을 기준으로 11권에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분량이 우선 손길을 멈칫거리도록 만드는데, 읽기를 시작한 다음에도 화자를 둘러싼 분위기를 시시콜콜 서술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침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긴 문장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크기의 활자를 이용하여 일렬로 배열할 경우, 그 길이는 약간 못 미치지만 무려 4미터에 이르고, 웬만한 와인병의 아랫부분을 17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정도(41쪽)”의 문장을 제5권에서 볼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작은 글씨로도 한 쪽을 넘기는 분량의 이 문장은 베르뒤랭 부인의 응접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베르뒤랭부인은 ‘소돔과 고모라’편의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발베크에 있는 그녀의 별장에서부터 ‘갇힌 여인’ 편에서는 파리에 있는 그녀의 집 응접실이 사교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꿈나라로부터 솟아오른 소파 하나가 놓은 곳 주위로는”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연이은 집들, 베르뒤랭의 응접실 각각에 내재하는 듯했다.(42-43쪽)”에 이르는 문장을 여전히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산책을 나가는 양재천 산책길 한 모퉁이에는 산사나무들이 심겨있는 곳이 있습니다.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산사열매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프루스트처럼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솔길에는 산사나무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 산사 꽃향기는 마치 내가 성모마리아 제단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그 형태 안에 뚜렷이 드러나며 촉촉하게 내 주위를 감돌았고, 장식된 꽃들 역시 마치 성당의 붉은 복도 난간이나 채색 유리창살 대에 투조 세공을 한 딸기 꽃의 하얀 살로 피어난 꽃들처럼, 저마다 방심한 표정으로 섬세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불꽃 양식 잎맥 무늬 수술다발을 들고 있었다.(244쪽)”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돋보기, 아니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세밀하게 살펴 글로 묘사한 프루스트의 능력에 놀랄 따름입니다.

프루스트는 병약했다고 합니다. 열 살 때 시작한 천식은 평생 그를 괴롭혔는데, 특히 낮에 기침이 심했기 때문에 낮과 밤을 거꾸로 살았다고 합니다. 민감한 피부와 이웃의 소음도 그를 괴롭혔는데 이는 지나치게 발달한 오감을 통하여 주위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점에 대한 반대급부였을 것입니다. 보통은 오직 고통을 받을 때에만 우리가 적절하게 탐구적이 될 수 있다는 프루스트적 논리를 지적하고, “사람이 지혜를 얻는 두 가지 방법 - 하나는 선생님을 통해서 고통 없이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 - 가운데 고통스러운 쪽의 지혜가 훨씬 더 우월하다는 프루스트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를 모두 직접 경험을 통하여 얻을 수만은 없는 한계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들을 골라 그들이 받은 고통이 무엇이고 효과적인 대응방법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지위 상승을 열망하는 베르뒤랭 부인과 앙드레의 어머니,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프랑수와즈, 자기 확신이 넘치는 블로크, 애인 오데트의 마음을 독점하기 위하여 마음앓이를 하는 스완 등입니다. 프루스트는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들의 고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줄 따름입니다. 보통의 작중인물에 대한 분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프루스트는 너그러웠고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의 친구들은 ‘프루스트화하다’라는 동사를 만들어냈겠습니까? 이 단어는 “약간은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아울러 속된 말로 표현하면 끝도 없이 유쾌한 겉치레”를 가리키는 것이다.(170쪽)”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주변에 이런 사람 하나쯤은 꼭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프루스트도 “대화, 이것은 우정의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상은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주지 않는 피상적인 여담에 불과하다. 우리가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151쪽)”고 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보통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책을 내려놓는 방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책읽기에 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샛길로 빠져서 마무리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는 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내놓은 저자는 우선 프루스트가 앙드레 지드에게 “우리 동시대인들 사이의 유행과는 반대로, 나는 인간이 문학에 대한 매우 고상한 관념을 가지는 동시에 문학을 향해 온화한 조소를 던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239쪽)”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다음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책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또는 오히려 물신주의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위험에 관한 독특한 자각을 표현했던 것이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이 쓴 책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유익함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그 한계의 음미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독자들이 건강한 책읽기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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