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외과전문의인 허경발 박사는 1972년 당시 미국에서 시행되던 'BCG 면역치료요법'을 이용한 암 치료법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당시 허 박사가 22명의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BCG 면역치료요법 임상결과를 발표하자 한국 의학계에서는 커다란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치료 효과가 확인되고 외국 연구문헌에서도 그 효과가 입증되면서 허 박사는 항암 면역치료요법을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외과의학의 산 증인으로 꼽히는 허경발 박사가 70년을 외과의사 인생을 회고한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시오'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올해로 91세인 허 박사는 이 책을 통해 외과의사로서 녹록지 않았던 삶을 꼼꼼하게 되짚어냈다.

이 책을 통해 허 박사는 시인 박목월, 이당 김은호, 평보 서희환 등 문화예술계 인사와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방우영 전 조선일보 회장 등 정치계와 언론계 인사 등의 유명 인사들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잊을 수 없는 환자들'이란 소제목이 붙은 책의 2장에는 ▲사람 배에 ‘지퍼’다는 연구나 하시오 ▲갑상선 수술과 박목월 시인의 청노루 ▲김은호 화백의 도화봉작도(桃花蜂雀圖)  ▲헛똑똑한 서울‘놈’ 의사 ▲세계 최대의 담석을 지닌 스물넷 젊은이 ▲50환 짜리로 100만 환을 낸 담도폐쇄증 환자 ▲대변을 걸러 담석을 모아온 원 생원(生員) ▲간암 수술 후 19년 생존한 엄 차관의 부친 ▲손해 배상을 요구하던 위암 환자의 부인 등 여러 환자와의 인연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냈다.

허 박사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인연은 담석 제거 수술을 받았던 어느 환자였다.

2차례의 개복수술에도 몸 안에 담석이 남아있자 그 환자는 허 박사에게 “사람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란 말이요. 담석이 재발하거든 지퍼를 열어 담석을 제거하고 지퍼를 스윽 닫으라는 말이요. 알겠소?” 라고 호통을 쳤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간 내 담석이 소장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하는 의료기술을 개발했다.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시오'라는 이 책의 제목은 그 환자에 관한 기억을 담아낸 것이다.

BCG 면역치료요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하고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결과를 발표했을 때의 일화도 담았다. 

"이 요법에 대한 소란한 논쟁이 잦아들었고,  늦은 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비난을 퍼붓던 장난도 잠잠해졌다. 미국 주간지인 TIME 지 1972년 5월 22일자 P44에 여성 유방암 치료에 BCG 요법이 유효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시끄럽던 비난의 소리가 종적을 감추었다."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시오' 52쪽>

이 책에는 한 외과의사의 녹록지 않았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지만 그렇다고 무겁게만 다가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고 유쾌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글 사이사이에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그의 '따뜻한 인술'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허 박사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회고록을 낸 이유를 "이제 내 나이 90이 되었고, 의사로 살아온 세월만도 70여 년이 되어간다. 긴 세월 겪은 이러저러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의사로 살아오는 동안 만약 나에게 오해가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이 기록이 당시의 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더불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왔다는 보고도 하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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