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서리풀 논평] 남북 평화체제 구축이 먼저다

[라포르시안]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곧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곧 전쟁이 날 것 같았지만, 이제 기차를 타고 베를린을 갈 수 있느니 개마고원 트래킹을 가느니, ‘안심’ 분위기로 일변했다. 가끔 너무 앞서 나가는 기대도 있다 싶지만, 평화체제로 가는 길을 뒷받침하는 것이면 약간의 흥분도 나쁘지 않다. 이제 막 입구에 들어섰으니 큰 어려움 없이 새 시대가 열리기 바란다.

희망과 가능성이 크다 하더라도 모든 일이 저절로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당분간 대세는 거스를 수 없겠으나, 현실과 실질, 관계까지 묶인 각론은 어렵고 복잡하다. 자주 듣는 서양 속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도보다리’를 산책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도보다리’를 산책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각론에 들어가면 백가쟁명의 소리가 당연히 나온다. 체제 문제는 조금씩이라도 각자의 이해가 달렸으니, 누구든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일 비용이 대표적인 아닌가 싶다. 말을 시작하는 순간 누군가는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소리가 나온다. 

삶에서 드러날 이해와 손익을 다루는 것은 그 자체로 ‘작은 생선 굽듯 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작고 구체적인 일들이 돌고 모여 총론을 흔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평화와 생명으로 가는 길에 우여곡절이 될 수도 있는 몇 가지 경향을 미리 걱정한다. 

첫째, 평화체제 구축에 집중하자.   

통일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역사적 과제임을 모르지 않지만,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단체제가 남긴 핵심 교훈이다. 상대가 있고 국제 정세가 있는데, 하고 싶다고 또는 할 수 있다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북한은 ‘체제 보장’을 관건적 요구로 내놓지 않았는가.

지금 ‘좋은 이웃’을 목표로 삼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더 멀리 갈 수도 있다. 이런 접근이 논쟁적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현실은 이미 이 길로 접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북미정상회담에서 ‘체제 보장’을 논의해야 하고 평화협정도 같은 맥락이다. 공존, 공영의 토대를 쌓아야 다음 기회를 엿볼 수 있다.  

말만 그렇게 하지는 소리가 아니다. 시간, 공간으로 범위를 정하고 목표를 다르게 잡으면 당장 해야 할 일과 일의 우선순위도 조금씩 달라진다. ‘통일 이후 보건의료체계’나 ‘독일 통일이 사회보장제도에 미친 영향’ 같은 것은 천천히 다음 차례에 검토하기를 제안한다(한참 전에 한차례 유행이 지났으니, 필요와 수요가 적기도 하다).

평화체제 구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또한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남북의 긴장 완화와 교류에 힘쓰는 것, 그리하여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은 다양한 가치와 이념, 목표가 상충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가 도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중첩적 합의’이다.   

둘째, 경제 중심, 경제 만능은 옳은 접근인가?

남북 평화체제가 남북한 모두에 경제적 효과를 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노동력, 자원, 자본, 기술 그 무엇이든, 두 체제가 모두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로와 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두고 한국 내 건설과 토목 기업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봐도(관련 기사 바로 가기), 경제는 현실을 밀고 가는 동력이다.   

두 체제를 구속하는 도구로 (잠재적) 경제의 위력을 인정하지만, 한편 모순적 양면성을 지닌다는 점은 걱정스럽다. 막상 경제효과가 크지 않으면 평화체제의 동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부정적 측면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에 근접한 한국 경제가 ‘북한 특수’로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평화체제로 가야 하는 동기로 충분할까?

남북한이 합치면 소득이 세계 몇 등이고 경제규모가 어디보다 크다는 등,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한 완고한 성장주의, 그리고 국가주의와 결합하면 셈은 더 어려워진다. 희망과 비전을 품는 것은 경제에서도 예외가 아니지만, 물신화한 욕망이 좌절하면 반동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법이다. 우리보다 사정이 나았던 독일도 통일 이후 차별적, 국수주의적 파시즘이 부활하는 사태와 마주하지 않았는가.   

경제주의의 여파는 물적 토대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는 모든 것을 시장과 상품으로 환원하는, 일종의 ‘윤리’ 문제를 함께 제기하기 때문이다. 돈과 돈벌이를 빼고는 다 소용없는 것이라면, 평화체제가 추구하는 그 평화의 실질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어떤 평화인지 동요할 것이 뻔하다. 

평화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돈벌이에 더 우월한 상품과 경제로서 작동할 수 있다면, 긴장과 전쟁조차 돈을 매개로 평화를 위장할 수 있는 법. 수출을 늘리겠다고 군수 산업을 키우는 것이나 지역 경제가 나빠진다고 군부대 철수를 반대하는 것은 경제화한 평화의 대표적 모습들이다.  
 
셋째, 유사 ‘제국주의’ 경향을 걱정한다.

남북 사이에 여러 측면에 차이와 격차가 있으니, 호혜와 상호의존은 당연히 한계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경제와 생활 수준이지만, 건강과 보건도 마찬가지다. 평균수명을 비롯한 건강부터 차이가 뚜렷하고, 이와 관련된 인력이나 시설, 물자 등 자원의 대비 상태도 격차가 크다.

차이가 크면 무슨 일을 해도 일방적이고 한 방향이 되기 쉽다. 형편이 아쉬운 쪽에서 ‘무엇이라도 좋다’고 하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남한에서는 환경 규제 때문에 더는 쓰지 못할 발전 시설을 북한으로 옮긴다고 상상해보자. 이제 막 임상시험이 끝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는 의약품을 공급하는 것도 비슷하다.

말은 험악하지만, 대단히 나쁜 일을 해야 제국주의가 아니다. 오죽하면 일제(일본 제국주의)도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할까. 무엇인가 주는 쪽, 하는 쪽, 결정하는 쪽의 이해관계가 앞서면 제국주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 말하는 ‘제국주의’는 한편으로 관례적 용법이지만, 부분적으로 사회경제체제를 나타내는 용법이기도 하다.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이 한국의 사회경제 문제와 과제를 해결하는 동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인도주의는 언제라도 제국주의로 돌변할 수 있다.

시설, 인력, 물자, 재정 등 물적 토대보다 문화, 가치체계, 사고방식 같은 무형의 토대가 더 걱정스럽다. 남한 체제에 조응하는 문화와 가치(예를 들어 경쟁과 효율)를 당연하게 전제하고 북한을 이에 맞추겠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일방적이다. 탈북자들의 호소를 들어보라. 사람의 마음과 의미야말로 평화체제 구축을 방해하는 주범이 될지도 모른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은 이제 막 출발해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점진적이지만 꾸준하게, 아울러 방향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길이다. 형편이 이럴 진대, 외부 정세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 스스로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성찰과 공부, 실천이 모두 필요하다.

예컨대, 평화체제에 대한 개방적이고 성찰적인 논의, 그리고 그를 위한 민주주의의 심화.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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