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생활세계 또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라포르시안] 한 대형병원에서 간호사가 목숨을 끊은 것을 계기로 ‘태움’ 문화가 다시 관심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까? 모르긴 해도 조직문화에 대한 상식적 진단, 개인 탓이 아니라 구조적 요인이라는 지적, 국회에서의 법률 논의라는 ‘전형적’ 경로로 갈 가능성이 크다. 그 끝은 늘 그렇듯 몇몇 당사자를 빼고는 유야무야가 아닐까?

그 전형적 해법 찾기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조직문화와 구조 요인에 대한 진단과 함께 문화와 규범을 바꾸는 정책과 관리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따라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집요한 문제 제기와 지속적 실천이 필요함에도.

의료계 안에 폭력과 학대가 만연해 있다는 뉴스는 새삼스럽지 않다. 간호사의 태움 문화나 전공의에 대한 폭력은 잊을 만하면 다시 드러나는 만성적 문제다. 심각성은 2015년 인권위와 보건의료노조가 조사한 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지난 12개월 동안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11.7%가 신체폭력을, 44.8%가 언어폭력을, 6.7%가 성희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자 전공의는 응답자의 14.5%가 신체폭력을, 55.2%가 언어폭력을, 16.7%가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 것처럼 때맞추어 발표된 대한간호협회의 조사결과도 큰 흐름이 비슷하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지난 12개월 동안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예’라고 응답한 비율이 40.9%에 달했고, 가장 최근에 괴롭힘을 가한 가해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직속상관인 간호사 및 프리셉터가 30.2%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동료간호사가 27.1%, 간호부서장이 13.3%, 의사가 8.3%로 직장 내 괴롭힘의 대부분이 병원관계자로부터 발생하고 있었다.”

현상이 이렇고 그것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면, 이제 원인 특히 근본 원인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중 한 가지, 인력 부족과 장시간 노동은 따로 근거를 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기억을 되살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의사든 간호사든 또는 그 어떤 인력이든, 그 어느 직장과 조직이든, 심지어 태움과 폭력이 있든 없든, 인력과 노동시간 등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노동 ‘착취’는 건강을 해치고 삶을 빼앗으며 결국 생명을 파괴한다.

우리는 인력 부족이나 장시간 노동과 함께 또 다른 구조로서 ‘신자유주의적 병원’에 주목한다. 성과와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이 병원에서 모든 노동자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따라 행동한다. 원자화된 개인주의자, 그리고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이로써 인간관계의 친밀함, 공동체적 유대, 진지하고 성실한 인간관계, 장기간의 헌신 같은 가치는 어울리지 않는다. 

적은 인력으로 일을 빨리 마쳐야 제때 퇴근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신입 직원은 무엇이 될까? 이들은 ‘후배’나 ‘동료’가 아니라 내 ‘경쟁력’을 훼손하는 (비인간화한) 노동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부하 직원은 내 성장의 토대가 되는 ‘인적 자본’으로, 따라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물화’되고 소외된다. 태움과 학대,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병원에서 태움과 폭력 인권 침해를 없애는 데 구조는 시작이고 기본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어디 병원만 그렇던가. 모든 직장과 모든 노동은 구조이면서 또한 그 안에 속한 주체들이 빚어내는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의 세계다. 사람을 대상으로 노동하는 곳일수록 인간관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고 중요할수록 ‘문화’는 사건과 경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구조이다. 

의료기관과 의료직의 폭력적 위계 문화는 완강한 구조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여러 이유 가운데서도 생명을 다루는 직종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명분이다. 생명을 이유로 반(反)-생명을 용인하는 역설이라니.

문화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생성되는 권력이다. 의료전문직의 문화와 이에서 비롯된 행동은 하루아침에 그리고 독립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다른 직종과 달리 의료직의 ‘사회화’ 과정에는 대학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그런데, 그 대학부터 형편이 이렇다.

“한 사립대학 간호학과에서 선배들이 신입생의 군기를 잡는 강압적인 내용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발송해...(중략)...메시지에는 신입생이 지켜야 할 10개 항목이 상세히 적혀 있다. 해당 문자에서 신입생은 도서관 외에는 엘리베이터 탑승이 금지된다. 계단을 이용해 다녀야 한다. 밝은색 머리 염색과 트레이닝복, 슬리퍼 착용도 금지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저녁 9시, OO향우회 4학년생 A·B 두 명이 예과·본과 1·2학년 남학생 약 10명을 소집해 가혹행위를 했다....(중략)...2학년생 한 명이 식당 앞에서 A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은 게 발단이 됐다....평소에도 2학년 행동에 불만이 많았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보건의료계열 대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당수 대학이 이와 비슷한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보편적인 문제일수록 심층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고가 나고 말썽이 생겨도 그때뿐, 완강하게 지속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하나의 토대 또는 구조라 해야 할 것 같다.

토대와 구조의 한 가지 연원을 한국 사회의 폭력성에서 찾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하나의 ‘병영’이 되었고, 억압과 복종, 지배와 순응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학교는 역사적 폭력과 내면의 폭력을 ‘물화’하는 공간이자 매개다. 이런 맥락에서 학교 구조가 직업과 직장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분야가 폭력에 더 취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폭력문화와 신자유주의적 구조가 만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답답한 상황의 원인이다. 다시 말하지만, 병원이나 의료기관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한국의 수많은 직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는 괴롭힘은 보편적 토대 위에 있다.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해결 방법도 다르다. 우리는 법이나 지침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관료주의적) 발상으로 문제를 줄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지금 이 자리(병원, 의료, 의료직)에서 해소하겠다는 대책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보편과 토대에 접근하지 않으면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신자유주의적 병원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이는 다른 기회에 다시 말하기로 한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폭력성과 이를 물화하는 사회화 과정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문제를 다시 꺼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를 계발하고 강화하는 것 이외에 마땅한 해답을 생각하기 어렵다.

노파심에서 말하면, 여기서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나 구조를 벗어나 일상과 개인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굳어진 학술용어에 연연하지 말자). 그보다는 권력구조를 목표로 하되 거기에 가 닿을 수 있는 ‘체화된 실천’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생활세계에서 실천하고 실현하는 민주주의는 더 좋은 구조를 만드는 토대가 되고, 새로운 구조는 다시 실천을 촉발하고 증진한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이나 학생회는 생활세계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좋은 노동조합과 학생회는 다시 직장과 학교의 생활세계를 더 넓고 깊게 민주화한다.

범위를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직장과 학교의 경계를 넘어 ‘체제’를 재구성하는 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서 미뤄 놓았던 과제, 신자유주의적 병원과 작업장을 바꾸는 것 또한 민주주의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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