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뷰] 환자안전사고 자율보고·병원내 전담인력 배치 겉돌아..."적정 의료인력 확보 없이는 힘들어"

항암제 '빈크리스틴'
항암제 '빈크리스틴'

[라포르시안] #. 2010년 5월, 당시 종현이는 아홉살이었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의료사고로 짧은 생을 마쳤다. 담당 주치의였던 전공의의 실수로 정맥으로 투여해야 할 항암제 빈크리스틴이 척수강으로 투여됐다.  빈크리스틴이 척수강으로 주사될 경우 중추신경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상행성마비 등의 증세를 보이다 대부분 열흘 이내 사망하게 된다.

빈크리스틴 투약오류는 의료사고 중에서도 환자에게 영구적 손상을 입히거나 사망까지 초래하는 중대한 '적신호 사건(Sentinel event)'에 속한다.

특히 이런 투약오류는 단순히 실수나 업무착오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병원내 환자안전 관리체계의 구조적 결함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사안이 중대하다.

빈크리스틴 같은 약물을 척수강으로 투여할 경우 병원 내에서는 담당 의사와 간호사의 이중확인은 물론 척추강내 투여하는 주사제 라벨(환자 이름, 약물명, 투여방법) 확인, 투여 직전 의료진의 마지막 확인 등 까다로운 환자안전 확인절차를 거치게끔 하고 있다.

빈크리스틴 투약오류가 발생했다는 건 병원내 환자안전 확인절차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고를 계기로 환자단체가 '환자안전법' 제정 운동에 나섰다. 이 사안에 관심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환자안전법을 제출했고.  2014년 12월 말 국회를 통과했다.

환자안전법은 공포 후 1년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지난 2016년 7월 말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환자안전법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병원내에서 발생한 환자안전사고에 대한 의료인 등의 자율보고를 분석해 의료기관 전체를 학습시키는 ‘보고학습시스템’을 구축토록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병원에 환자안전을 전담하는 조직과 전담인력을 두도록 한 것이다.

환자안전 보고학습시스템은 자율보고 된 환자안전사고의 검증 및 분석을 통해 환자안전정보를 의료기관 전체에 공유해 동일한 안전사고 재발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보고학습시스템 운영은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이 맡고 있다. 인증원으로 접수된 환자안전사고 사례는 내부 분석을 거쳐 개인식별정보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조치한 후 다른 의료기관에서 동일한 환자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정보로 제공된다.

환자안전사고 자율보고, 제대로 이뤄지고 있나

4일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의 '환자안전 보고학습시스템 포털사이트(www.kops.or.kr)'에 따르면 올 1월 현재까지 접수된 환자안전사고 지율보고 건수는 총 4,499건으로 집계됐다.

최근 3개월간 월별 보고건수를 보면 2017년 10월 389건, 11월 529건, 12월 449건에 달한다. 올 1월 들어서도 벌써 72건의 환자안전사고 자율보고가 접수됐다.

보고된 건수로만 보면 상당한 성과가 있는 듯 하다. 하지만 환자안전사고 자율보고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중대한 환자안전사고가 발생해 의료분쟁이나 소송이 진행 중인 사례는 제대로 자율보고가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소비자원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의료기관평가인증원 등 3개 기관의 자료를 확인한 결과, 환자안전사고 자율보고가 시행된 이후 1년간 2,700건 이상이 보고됐지만 의료사고로 피해구제 또는 피해보상 소송을 진행 중이면서 환자안전사고 자율보고에 접수된 유사사례는 각각 1건에 불과했다.

소송까지 연결된 환자안전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사례보고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작년 7월 중 발생한 기관튜브 제거 후 공기색전증이 발생한 환자안전사고는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서 피해구제 절차를 진행 중임에도 환자안전사고 보고에는 누락된 것으로 확인됐다.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의료기관이 자율보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환자안전사고 사례를 전체 의료기관이 공유해 학습토록 해 유사한 사고의 재발을 막는 게 환자안전법 제정 취지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환자안전사고 정보는 보고가 되지 않는다. 다른 의료기관이 관련 정보를 보고 환자안전 시스템을 재검검해 동일한 안전사고 재발을 막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다.  

김승희 의원은 “정작 중대한 환자안전사고가 자율보고에서 누락되어 환자안전법이 겉돌고 있다”면서 “환자안전법 개정을 통해 소송중인 환자안전사고 사례까지 보고돼 실효성을 갖출 수 있도록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미지 출처: 의료기관평가인증원 '환자안전 지침'
이미지 출처: 의료기관평가인증원 '환자안전 지침'

병원내 환자안전 전담인력 배치 제대로 안돼..."적정 의료인력 확충 더 시급해"

의료기관의 환자안전 전담조직 및 인력 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환자안전법에 따르면 200병상 이상 병원은 환자안전위원회를 설치해야 하고, 병상 규모별로 의사와 간호사로 환자안전 전담인력 1~2명을 배치해야 한다.

5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은 2명 이상 전담인력을 둬야 한다. 100~500병상 미만 종합병원과 200병상 이상 병원·치과병원·한방병원·요양병원은 1명 이상의 전담인력을 배치토록 규정했다. 

상당수 의료기관에서 환자안전위원회는 설치했지만 전담인력은 규정대로 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전국보건의료노조(위원장 유지현)가 환자안전법 시행 1년을 맞아 노동조합이 조직돼 있는 200병상 이상 병원을 대상으로 환자안전위원회와 환자안전 전담인력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7월말 기준으로 조사대상 74개 병원 중 환자안전위원회가 구성된 곳은 97.3%(72곳)에 달했다. 반면 환자안전 전담인력 배치는 상당히 저조했다.

74개 조사 대상병원 중 환자안전 전담인력이 실제 업무를 전담하는 곳은 42개 병원으로 56.7%에 그쳤다. 나머지 32개 병원(43.2%)은 환자안전 전담인력이 다른 업무를 겸임하고 있었다.

'200병상 이상 병원은 환자안전 및 의료 질 향상에 관한 업무를 전담해 수행하는 환자안전 전담인력을 두도록' 한 환자안전법 규정을 어긴 것이다.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원내에서 환자안전사고의 정보 수집과 원내 교육, 환자안전활동 보고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정기적으로 환자안전활동에 대한 교육도 받아야 한다. 이를 감안하면 다른 업무를 겸임하는 상태에서는 환자안전 관련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한 병원에서 환자안전을 위한 본인확인 중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펴고 있다.
한 병원에서 환자안전을 위한 본인확인 중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펴고 있다.

병원들이 환자안전 전담인력을 제대로 배치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건비 부담 때문이다.

환자안전법 시행에 따라 환자안전사고 보고 시스템 구축과 환자안전위원회 설치 및 운영, 전담인력 양성과 운영에 따른 비용을 오롯이 병원이 부담해야 한다.

환자안전법 시행을 앞두고 병원계는 환자안전사고 보고학습시스템 구축과 환자안전활동에 투입되는 인력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그나마 지난해 10월부터 '환자안전관리료' 수가가 신설됐다. 환자안전관리료 급여기준을 충족하는 상급종합병원에는 1,750원(입원환자 1일당), 종합병원은 1,940~2,050원까지, 병원급은 2,270원의 수가가 지급된다.

병원들은 환자안전관리료 수가로는 전담인력 운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충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한 종합병원 관계자는 "환자안전 전담인력은 대부분 경력이 많은 간호사가 맡고 있는데 입원환자 1일당 2천원 안팎의 수가 적용으로는 인건비와 환자안전 관련 시스템 구축에 추가로 드는 비용을 보전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병원들은 간호사 등 의료인력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다. 그동안 전공의와 간호사의 노동력을 쥐어짜 내는 방식으로 인력 부족을 메워왔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내몰린 전공의와 간호사들이 수면부족과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려 업무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환자안전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한 대학병원 간호사는 "병원에서 환자안전 관련 시스템을 계속 강화하고 있지만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의료인력의 피로도가 누적되면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다"며 "환자안전을 위해서는 병원이 적정 의료인력 확충할 수 있게끔 제도개선이 더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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