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능력주의’는 정의인가?

[라포르시안] 비정규직을 줄이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자본과 기업이 어떻게 하리라는 상황은 예상했지만, 일부 정규직 노동자가 반대한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특히 청년층 정규직이 강하게 반대한다니 (관련 기사 바로 가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느 회사 ‘정규직 전환 반대’ 포스터에 적혔다는 내용을 보면, 반대하는 이유와 심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공명정대한 공개채용 제도를 부정하는 특혜성 정규직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규직화 정책인가요?”, “기준 없는 무분별한 그들만의 정규직화는 취업을 준비하는 수많은 청년들을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더 많이 준비하고 노력한 청년들에게 정규직 일자리가 돌아가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무수저 서민에게 평등이란, 기회의 평등입니다. 반칙으로 이뤄진 결과의 평등은 다음 번 당신의 기회를 빼앗을 겁니다”.

찬성과 반대를 넘어 먼저 안타깝고 답답하다. 정치와 경제 ‘구조’가 비정규 노동을 양산하고 온갖 고통을 만들어냈는데, 해결 과정에는 개인들이 분열하여 갈등과 긴장을 부담해야 한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부담은 사회화”하는 이 시대의 교리, 그리고 개인까지 이를 내면화하게 한 교묘한 통치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갖가지 속사정을 모두 알기는 어려우니, 정규직 청년들의 불만을 일축하고 싶지는 않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정규직 취업에 성공한 것이 ‘공명정대한 제도’와 ‘기회의 평등’ 덕분이라 하지 않는가. 이제 이를 무너뜨리는 것에 스스로 성취한 것을 부정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와 역사가 구축한 ‘정의’는 이를 넘지 못했음을 절감한다.

일부 사정을 이해한다고 그들의 ‘반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와 분노의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 가장 크다. 정의와 기회의 평등을 주장해야 하는 대상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지금까지 온갖 특혜와 반칙을 일삼은 특권층이 아닌가?

공기업 채용 비리에서 보듯 이런 종류의 부정의는 과거사가 아니다. 어디 채용만 그럴까. 정규직의 현재와 가까운 미래 역시 모두가 외치는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불공평한 임금과 소득, 공정하지 못한 노동과 일터, 게다가 온갖 연고로 촘촘하게 짜인 전근대적 관계는 공명정대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협력하여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를 기대하면서, 오늘 우리는 이 ‘현상’의 한 가지 이유를 좀 더 넓고 밝게 드러내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한 가지 가치체계 또는 신조인 ‘능력주의’다.

학력, 시험, 학업성취, 업무능력 등이 보상과 가치배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바로 그 강고한 믿음. 능력주의(영어로는 ‘meritocracy’라 한다는데 1958년에 만들어진 신조어다)는 분명 정의의 한 요소를 담고 있다. 과거시험을 통한 고려와 조선의 공무원 충원 방식이 세습이나 연고보다는 더 공정한 기회를 보장했을 것이다. 구체제의 신분제를 철폐하고 정부 관료를 등용하는 데 능력주의를 적용한 나폴레옹의 시도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 일만도 아니다. 사법시험을 존속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이나 내신보다 수능이 더 공정하다는 여론은 지금도 이어지는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를 잘 보여준다. 안타깝지만 현실에서는 한국 사회 구성원이 동의하는 정의의 최대치가 능력주의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의관’의 현실을 이해하지만, 능력주의는 ‘과정적 정의’ 중에서도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능력주의는 더는 유일한 정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침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졌으니, 그 이유 몇 가지를 같이 생각해보고 싶다. 

첫째, 흔히 말하는 그 ‘능력’이 정말 능력인가 의심스럽다. 능력에 따른 차별이 당연하다고 주장할 때 그 능력은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가리키는가? 시험에 합격했거나 공개채용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 정말 능력인가?

모두가 그 능력의 실체를 안다. 수천 년을 두고 과거-고시-대학입시로 이어지는 ‘능력평가’란 기껏해야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실재하는 능력’의 한 부분을 겨우 반영할 수 있을 뿐이다. 제도화된 정규 시험을 통과했다고 학생을 잘 가르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둘째, 능력을 기준으로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는 것이 정의인가? 학교의 학생 자격, 일자리, 권력, 부와 소득 등 어떤 가치든 마찬가지다. ‘보상’은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는 한 가지 기준일 뿐, 권리나 평등 같은 다른 중요한 기준을 같이 고려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했듯이, 대학의 입학자격은 뛰어난 능력이나 미덕을 보상(또는 포상)하는 절차로 끝나서는 안 된다. 만약 대학 입학이 능력에 대한 보상이라면 대학의 사명과 역할은 어떻게 되는가? 미국의 대학들이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따라 성적(능력)이 덜 좋은 학생을 뽑는 것은 정확하게 능력주의를 배반하는 행동이다. 

일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으로 능력을 평가하든 그것이 능력과 미덕을 보상하는 것이면, 본래 그 일과 자리가 해야 하는 기능과 목적은 어떻게 충족할 수 있는가? 국가와 사회, 기업이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개인의 능력과 ‘덕’을 보상하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보상만이 기준이 아니라고 할 때, 바로 걸리는 문제. 사회적 가치(예를 들어 일자리나 소득, 자원)를 배분할 때 ‘권리’는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권리는 ‘자격’이나 ‘응분’에 좌우되지 않는다. 능력은 더구나 기준이 아니다.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크게 다친 환자가 응급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때, 그 권리는 환자의 도덕성, 사회적 기여, 경제 능력을 가리지 않는다. 자격과 응분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비정규 노동에 내재하는 차별적 임금, 불안과 고용 불안정, 자기 모멸은 어떤가?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의 동료들이 이런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일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셋째는 그 어떤 능력도 그 자체로 공정하지 못하며, 전적으로 그에 기초하는 한 그 어떤 것도 공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능력’은 흔히 학력(또는 학벌), 학업 성취, 성적을 가리키지만, 바로 그 능력은 심각한 불평등 구조의 산물이다. 한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에 가까운 것을 공정을 잣대로 삼을 수 있는가?       

“0~8세 아동의 기본인지기술 점수를 분석한 결과, 모든 연령에서 소득수준에 따라 점수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특히 학령기에 진입하는 7세 이후부터 빈곤층 < 차상위층 < 차상위 이상의 순으로 기본인지기술 평균점수가 높아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는 읽기, 쓰기, 사회적 의사소통 등 인지 발달 영역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났으며, 학령기에 들어서면 연령이 높아질수록 소득수준에 따른 학업성취도의 격차가 커지는 결과를 보였다.” (관련 링크 바로 가기)

“가정형편에 따라 불평등한 사교육 기회, 사교육 정도에 따른 학업성취도 격차, 학업성취도에 따른 진학, 학벌에 따른 사회진출의 차이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순환과정을 통해 세대에 걸쳐 재생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중략)...가정의 경제형편이 평균보다 높을수록 현재소득이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주관적 차원에서도 계급이동성은 점점 제한되고 있으며, 자녀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상향이동 가능성 또한 높지 않다고 파악할 수 있다.” (전병유 엮음. <한국의 불평등 2016>. 페이퍼로드 펴냄. 93~94쪽)

이 정도만으로도 능력주의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보면, 이제 과제는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정의의 원리를 수립하는 일이다, 왜 필요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핵심 조건이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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