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어느 수필집의 제목인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이 한때 청춘담언처럼 유행했다. 극심한 취업난으로 연예,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었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다는 비난과 함께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해석 앞에서 맥을 못추고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프니까 000이다'는 아류작은 수없이 쏟아졌다. 급기야 '아프니까 전공의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전공의는 정말 아프다. 대형병원 입장에서는 '값싼 의사 노동자'인 그들은 주당 80~100시간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근무시간 때문에 아프고, 맞아서 아프다. 지도교수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성추행을 당한 전공의들의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지도교수에게 맞아서 찢어진 부위를 의사인 전공의들끼리 서로 봉합해줬다는 증언에는 그저 기가막히다. 매 맞는 전공의의 현실이 어제오늘 나온 이야기도 아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수련환경 개선 대책을 마련한다고 난리법석이다. 그에 맞춰 전공의를 상대로 한 병원내 폭행과 노동력 착취는 교묘해진다. 심지어 '우리 때는 더했어'라는 연배 지긋한 의사들의 말 속에서 노동착취와 폭언·폭행으로 점철된 수련의 추억은 마치 전문의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인 양 미화되기 십상이다. 노동착취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고, 폭언·폭행을 통해 작동하지만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행위의 엄중함을 위해서란 명분으로 정당화 하려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간호사라고 상황이 나을 게 없다. 병원의 만성적인 간호인력 부족으로 빡빡한 간호업무를 수행하는 일이 거의 일상화됐다. 그 속에서 선후배 간호사끼리 폭언과 폭행을 동반한 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 괴롭힌다는 '태움'이란 악습이 생겼다. 임신도 순번을 정해야 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근무환경은 좀처럼 바뀔 기미가 없다. 어느 병원에는 '출산휴가 순번제'까지 생겼다고 한다. 신규 채용한 간호사에게 실습 교육이란 명분으로 일을 시키고 시급 1500원으로 책정한 월급을 준 대학병원의 이야기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란 외침처럼 대나무숲을 떠돌다 밖으로 튀어나왔다. 5년간 병원 직원들의 월급 250억원을 체불한 어느 종합병원, 열악한 처우를 더는 견디다 못해 노동조합을 재결성하고 파업에 나선 병원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오죽하면 '을(乙)의 지옥'이라 부를까. <을지대병원·을지병원 파업 17일차…"사람에 먼저 투자하라" 외치는 직원들"강동성심병원, 240억 임금체불...한림대재단 소속 병원도 수사해야" >

개원가의 현실도 만만치 않다. '한 집 건너 병원'이란 말처럼 개원가는 공급과잉 상태다. 그만큼 환자 유치 경쟁이 치열하고, 진입장벽은 점점 높아진다. 개원시장에 신규로 진입해 살아남으려면 입지가 좋아야 하니 임대료 부담도 크다. 환자들한테 입소문도 나고 하려면 인테리어와 장비도 다른 병원과 비교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개원 초기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다. 어찌어찌 대출도 받고 해서 개원하면 그때분터 지옥문이 열린다. 대출금 이자도 내고 직원 월급도 주려면 일주일 내내 밤낮없이 병원 문을 열고 환자를 볼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 수가가 낮아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병원을 유지할 수 있다. 개원의사들은 그 속에서 스스로 노동착취의 주체가 되고 '월화수목금금금' 저녁과 주말이 없는 삶을 산다. 이런 환경에서 일차의료 강화니 의료전달체계니 하는 게 파고들 여지가 없다.  

이쯤 되면 한국 의료를 지탱해온 본질은 '착취'나 다름없다. 더 적은 월급으로, 더 적은 수가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방식으로 병원과 의료시스템을 유지해 온 셈이다. 해마다 나오는 'OECD 헬스 데이터'가 그걸 증명한다. 한국은 다른 국가보다 적은 의료인력으로 훨씬 더 많은 병상을 유지하면서 국민들의 높은 의료이용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료비에서 공적재원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OECD 회원국 중 꼴지 수준이고, 가계직접부담 비중은 최상위권이다. '저비용 고효율'의 의료시스템이라고 선전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솔직히 말해 이건 '저비용 노동착취' 구조라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저비용에 기반한 노동착취로 돌아가는 병원이 환자한테도 좋을 리 없다. 만성적인 인력부족으로 살인적인 업무강도에 시달리며 환자에게 눈길 한번 주기 어려울 만큼 지친 의사와 간호사, 저수가로 인한 박리다매식 진료패턴으로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가 2~3분 만에 처방받고 나가는 환자에게 제공되는 게 '양질의 의료서비스'일 수 없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꼭 필요하지만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를 통한 새 정부의 정책 방안이 병원과 의료인을 더욱 쥐어짜게 만들고, 착취 구조를 더 공고하게 할 것이란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국민이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하고, 병원이 적정 의료인력을 확충하고 시간에 쫓기듯 많은 환자를 보지 않아도 경영을 유지할 수 있는 의료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고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정수가를 보장하겠다고 대통령이 직접 약속했지만 보건당국 관료들은 이런저런 말로 그 약속의 의미를 희석한다. 그들이 무능하거나 나빠서가 아니다. 저비용과 착취에 기반한 의료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푸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일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의학 교과서와 논문 등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해 짧은 시간에 최적의 암 치료법을 찾아낸다고 알려진 '왓슨 포 온콜로지'를 작년 말부터 대형병원들이 너도나도 도입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바꿀 보건의료 혁명'이라는 성급한 기대감마저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한국의료가 처한 상황을 인공지능 시스템에 모두 입력하고 학습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추측하기에 암 진단이고 뭐고 그냥 자폭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 의료를 관통하는 깊고도 단단한 착취 구조를 들여다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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