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 파울로 코엘료 지음 /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지난해 6월 보스턴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적에 시간을 쪼개서 보스턴 시내의 명소를 걸어서 돌아보았습니다. 코플리 플레이스의 학회장에서 시작해서 올드 사우스교회, 보스턴 커먼, 그래너리 묘지, 킹스 채플, 옛날 주의사당, 올드코너 북스토어를 거쳐서 보스턴 항에 정박해있는 보스턴 티파티에 이르기까지 보스턴 역사에서 한 몫을 한 장소들입니다.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전철을 타고 보스턴 미술관으로 이동해서는 전시된 작품의 감상을 마치기까지 거의 여섯 시간을 강행군한 것입니다. 그동안 편하게 앉아 다리를 쉰 시간이라고는 간단한 점심을 먹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미리 예정한 일정이 아니라서 운동화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두를 신고서 오래 걸었던 탓인지 귀국한 다음날 시작한 무릎통증이 고질병이 되어 지금도 걷기를 삼가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대중교통이 닿는 곳으로 나서곤 하던 주말걷기도 어쩔 수 없이 쉬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은 유독 주말 날씨가 참 좋아서 주말마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억울함을 삭이곤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걷기는 벌써 7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주말에 다녀온 곳을 블로그에서 소개하다보니 소문이 났던지 월간지에서 걷기를 예찬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걷기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노릇이지만 막상 글로 옮기려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걷기 좋아하시면서 좋은 글을 남긴 분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님의 <걷기예찬>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고 시작하는 브르통교수님의 <걷기예찬>은 여기에 더할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 산책에 나섰던 것이 모 일간지에서 서울근교에 있는 걷기에 좋은 코스를 매주 소개하는 것을 보고 따라 걷는 것으로 발전하고, 아예 그런 코스를 엮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이라는 책을 사서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한강변을 따라서 100km의 거리를 다섯 번에 나누어 걷는 코스들 입니다. 평균적으로 20km를 다섯 시간 정도에 걷도록 되어 있습니다. 100km를 완주한 다음에는 더 긴 코스를 따라 걸으면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생겼는데, 생각의 나래는 제주의 올레길을 넘어,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이사장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에까지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 Tiago, Way of St. James),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생겼다. 절대 만만한 코스가 아니며 프랑스 남부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을 가로지르는 800km 여정. 한 달을 꼬박 걸어야 한다. 연금술사의 파올로 코엘료가 걸어 더욱 유명해졌다.”

직장에 매여 있어 아무래도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언제가 될지 몰라도 꼭 가보겠다는 생각만 해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긴 여행을 하는 경우 여행지를 직접 돌아보면서  감동을 얻는 것도 특별합니다만, 사실 저는 그 여행을 준비하면서 현지의 모습을 수도 없어 머릿속에 그려보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최근에 우연히 정진홍 교수님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적은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을 읽게 된 것으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문에 듣기로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한국 사람들을 제일 많이 만나게 된다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진홍 교수님은 '산티아고 가는 길'의 안내서가 아니라 그 길을 걸으면서 느낀 점을 기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오감을 통하여 느낀 것을 단순하게 기록하기보다는 그가 가진 풍부한 인문학적 재료와 섞어서 더욱 풍성해진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전하는 이야깃거리를 더욱 쫄깃쫄깃하게 만들기 위하여 인용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제일 먼저 맛보기로 했습니다.

<순례자>는 <연금술사로>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의 첫 번째 작품인데 198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걸은 느낌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례자>의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붙인 원주에 “내가 순례하던 그해에는(1886년)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연간 4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의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매일 4백명이 넘는 순례자가 이 글에 나오는 바 앞을 지나갔다고 한다.(341쪽)”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도 “<순례자>를 읽고 나는 언젠가 '산티아고의 길'에 가리라 예감했고, 또 그러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길을 걷게 되었다. '산티아고의 길'은 내게 '모비 딕'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 꼭 해내리라 다짐하는 그 무엇. <순례자>는 내게 생의 시간을 여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상상도 못 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적은 아마존 서평처럼 코엘료의 <순례자>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홍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순례자>는 람(RAM)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언어의 구전에 기반을 둔 비밀스런 종파에서 활동하는 저자가 마스터가 되기 위하여 나선 산티아고 순례를 통하여 삶의 신비를 깨우치는 훈련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은 혼자서 걷거나 혹은 가까운 사람끼리 동행하기도 합니다만, <순례자>에서는 순례길에서 저자의 깨우침을 도와주는 인물로 페트루스가 동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단체가 실존하는가 하는 문제나 저자가 깨우치려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페트루스가 저자에게 소개하는 단계별 훈련방식은 충분히 의미를 새겨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정진홍 교수님께서 눈보라 속에서 피레네 산맥을 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북받치듯 눈물이 났다고 적은 것을 읽었던 기억 때문인지, 코엘료 역시 “생장피에드포르와 가까운 한 마을의 폐허를 걷다가 갑자기 강렬한 마음의 동요에 사로잡히면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33쪽)”고 적은 부분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정진홍 교수님이 코엘료의 <순례자>가 남긴 암시의 영향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티아고 가는 길'이 남자의 눈물을 끌어내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남자의 눈물이 금기였을 조선시대에도 연암 박지원선생이 삼류하를 건너 요양의 백탑이 멀리보이는 탁 트인 요동벌판에 서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하셨다니 '산티아고 가는 길'과 요동벌판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페트루스는 코엘료에게 람의 의례를 순서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듭남을 익히는 '씨앗훈련', 평소 무관심했던 것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느리게 걷는 '속도훈련', 자신에게 관대해지도록 하는 '잔인성 훈련', 자신을 돌보는 사자(使者)를 만나게 해주는 '사자의 의식', 직관을 깨어나게 하는 '물의 훈련', 아가페의 의식인 '푸른 천체 의식', 죽음의 두려움을 일깨우는 '산 채로 매장당하는 훈련', 주위로부터 기를 끌어오는 '람 호흡법', 나쁜 결정을 인식하는 '그림자 훈련', 삶이 매순간 우리에게 주는 조언을 들을 수 있는 '듣기 훈련', 의식을 거행할 때 쓰게 될 '춤의 훈련' 등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은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억하면 좋은 습관 같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순례자에게 산티아고 길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순례를 시작해서 하루면 넘을 수 있는 피레네 산속을 일주일에 걸쳐 걸을 때 페트루스가 순례자에게 건넨 말을 곱씹어 보게 됩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거듭남의 행위와 관련된 매우 실제적인 경험을 하게 되지요.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처한 겁니다. (…)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사물의 아름다운 면만 보게 되고 살아있음을 더 행복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언제나 사람들은 성지 순례가 계시에 이르는 가장 객관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가고, 구하는 자에게 삶이 관대하게 베풀어주는 수많은 축복을 답례로 받아들이면서 말이죠.(51쪽)”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출발점에서 목적지가 정해진 코스를 걷다보면 미리 정한 일정에 맞추려 노력하거나 아무래도 목적지를 염두에 걷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걷기가 고행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트루스가 전한 람의 의례 가운데 '속도훈련'이 순례길에서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느리게 걷는 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십니까? 느리게 걸으면 고행으로만 느껴지던 걷기가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순례길에 숨어있는 메시지를 발견해냈다는 즐거움이 만들어내는 기쁨인 것입니다. 정진홍 교수님이 바람부는 벤토사의 한적한 길에서 바람과 풀이 사랑하는 듯한 모습을 읽은 것처럼 말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풀>에서 모티프를 얻은 듯합니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

정진홍 교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길가의 풀들이 바람 속에 누웠다 섰다를 반복하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풀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우리는 바람과 다툰 적 없어요. 우리는 바람과 싸운 적 없어요. 바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에요. 우리는 바람을 사랑해요. 바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거리며 춤출 수 있겠어요. 사람들은 꼼짝도 않는 우리를 죽었는 줄 알거예요. 그래서 뿌리째 뽑아버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바람 덕분에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알잖아요.'(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141쪽)”

코엘료가 순례길에서 만난 어떤 상인은 “순례는 성자들이나 하는 거요.(135쪽)”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코엘료 역시 람이라고 하는 비밀종파의 마스터가 되기 위하여 산티아고 가는 길을 따라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므로 상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꼭 성자나 교인이라야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걷는다>의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걷기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치유활동”이라고 한 것처럼 그저 걷기에 좋다면 걸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에베레스트 산에 최초로 도전했던 미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가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고 말한 것처럼 “그곳에 길이 있어 걷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코엘료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순례에서 얻은 '자신의 검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내 검의 비밀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얻는 모든 성취의 비밀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었다.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었다.(313쪽)” 그런데 검을 가지고 할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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