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 박거용 옮김 / 르네상스 펴냄, 2008년

[라포르시안] <픽션들>로 처음 만난 보르헤스를 Book소리에서 소개한 것이 2012년이었으니, 보르헤스를 만난 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읽어가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라는 긴 이름을 가진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평론가입니다. ‘20세기 세계문학의 지배자’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현대문학에서의 그의 위치는 절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인으로 출발하였지만,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 구조주의를 섭렵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여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학에도 뛰어나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 등 5개 국어를 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버드대학의 강연에서 호메로스의 시를 현대 영어와 9세기의 고대 영어로 낭송한 바 있습니다.

각각의 시를 우리말 번역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은 북쪽에서 날아오고, 서리는 들판을 묶으며, 가장 차디찬 낟알, 싸락눈은 땅에 떨어진다"

"It snowed from the north, rime bound the fields, heil fell on earth, the coldest seeds." 

"Norþan sniwde hrim hrusan bond hægl feol on eorþan corna caldast." 

영어는 그런대로 의미를 알 듯도 합니다만, 9세기 영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떤 의미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나무위키에서는 “보르헤스는 착상을 서술한 책이 있거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그 사실과 책, 인물에 대해 평을 하는 식으로 적는다. 그 사실과 인물, 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리고 서술이 핵심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문장을 끝내 문장과 서술, 상상의 갈증을 표현한다.”라고 보르헤스 작품의 얼개를 설명하고,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평을 인용하였습니다.(나무위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서 인용함) 사실 보르헤스의 작품의 끝에 이르면 황당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상상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셈이니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 셈이 아닐까요?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는 ‘보르헤스의 문학, 취향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입문서’라고 하는 출판사의 설명처럼, 어렵다고 하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읽었습니다. 특히 이 책의 내용은 1960년대 말 보르헤스가 하버드대학교의 노턴강연에서 가졌던 여섯 차례의 특강을 녹취하여 편집한 것으로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인 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1967년 10월 24일 시작된 강연은 12월을 거르고 매달 한 차례씩 열려 1968년 4월 10일에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강연의 녹음테이프는 도서관 어딘가에 30년이 넘게 감춰져 있다가 2000년에서야 다시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는 강연의 제목을 따온 여섯 개의 장과 함께 이 책의 편집을 맡은 칼란-안드레이 미하일레스쿠의 해설을 담은 ‘이런저런 다방면의 기교에 관하여’를 뒤에 붙여 구성하였습니다. 그녀는 보르헤스의 강연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첫 강연 ‘시라는 수수께끼’는 시의 존재론적 위상을 다루고 있으며, 둘째 강연 ‘은유’는 수세기에 걸쳐 시인들이 동일한 은유 유형들을 되풀이하여 사용해 왔던 방식을 논하는데, 그 유형들은 12개의 ‘본질적인 유사 형태들’로 환원시킬 수 있으며, 그 나머지들은 놀라게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 뿐이므로 그 생명이 짧다고 보르헤스는 암시한다. 서사시를 다룬 셋째 강연 ‘이야기하기’에서, 보르헤스는 서사시에 대한 현대 세계의 무관심을 논평하고, 소설의 죽음에 대해 숙고하며, 현대의 인간 조건이 소설의 이데올로기에 반영된 방식을 검토한다. 넷째 강연 ‘시 번역’은 시 번역에 대한 전문적 고찰이며, 다섯째 강연 ‘사고와 시’는 문학의 위상에 대해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수필가적인 태도로써 실증해 준다. 마법적이며 음악적인 진실이 이성의 안정된 허구들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보르헤스는 시의 의미는 맹목적 숭배물이며, 강력한 은유들은 의미를 강화하기보다는 해석학적 틀을 불안정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강연 ‘한 시인의 신조’는 그가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작성한 고백적 텍스트이며 일종의 문학적 유서이다.(191-192쪽)”

<픽션들>에 담긴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처럼 보르헤스의 기억력은 아주 비상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읽기를 좋아했고, 평생을 도서관 사서로 일한 탓에 30대 후반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한 그는 말년에 시력을 완벽하게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책읽기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는 논외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든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떨어진 시력을 보완하기에 충분했던가 봅니다. 원고를 써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르헤스는 여섯 차례의 노턴강연을 원고 없이 기억력에만 의존하여 치렀다고 합니다. 즉, 강연이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베어울프』, 『고대 북구 시가집』, 『아라비안나이트』, 꾸란 그리고 성경 등의 고전으로부터 라블레,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키이츠, 하이네, 포, 스티븐슨, 휘트먼, 조이스 그리고 물론 그 자신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에서 이끌어낸 인용문을 예로 들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의 기억력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그가 키웠던 하얀 고양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그가 키웠던 하얀 고양이.

앞서 이 책을 선택하면서 보르헤스에 대한 이해를 높여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실은 그 기대를 얼마나 채울 수 있었는지 단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중의 이런 기대를 의식했음인지, 보르헤스는 “맨 먼저, 여러분이 제 강연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또는 오히려 무엇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관해 명확히 알려드리고 싶습니다(9쪽)”라고 말문을 열고는 “저는 제 인생의 대부분을 문학에 바쳐왔는데도, 여러분에게 의혹만을 제공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10쪽)”라고 겸손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의혹을 가진다는 것은 곧 생각을 하게 만들고 결국은 답을 얻을 수 있게 될 터이니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는 시(詩)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를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별로 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시집에 적혀 있는 시는 그저 죽은 상징에 불과하지만 “적절한 독자가 그 책을 펼치노라면, 언어 또는 오히려 언어 너머에 있는 시는 살아나게 되고, 우리는 언어의 부활을 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경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시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보르헤스는 ‘사과의 맛은 사과 자체에 있지 않고 먹는 사람의 입 안에도 없다’라고 한 버클리주교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럼 사과의 맛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보르헤스는 사과의 맛은 사과와 그것을 먹는 사람 사이의 접촉을 통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시의 의미도 시를 읽는 행위를 통하여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강연 ‘은유’에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장자는 자신이 나비였던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 자신이 나비였던 것을 꿈꾸었던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이 사람이라고 지금 꿈꾸고 있는 나비인지 헷갈린다(45쪽)’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이 은유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읽으면서 그의 앎의 깊이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보르헤스는 은유의 전망이 아주 밝다고 하였습니다만 현실을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는 탓인지 은유법을 쓰거나 우회적으로 표현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은유의 전망이 어두울 것 같습니다.

세 번째 강연 ‘이야기하기’는 건너뛰고, 네 번째 강연 ‘시 번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서도 호메로스의 시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정말 지난한 일입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정말 어렵다고 합니다. 보르헤스 역시 영미문학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자국에 많이 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반역이다(Ttraduttore, traditore)”라는 이탈리어 경구(警句)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외국어 작품을 우리말로 읽을 때 의역된 작품이 나은 지, 아니면 직역된 작품이 나은 지는,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직장에서 좋아하는 표현, ‘사례별로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보르헤스가 매슈 아널드를 인용하여 ‘직역은 기이함과 어색함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신기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내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직역이라는 개념 성경의 번역으로부터 나왔다는 보르헤스의 생각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다섯째 강연 ‘사고와 시’에서는 시를 쓰는 방법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보르헤스는 평범한 문체와 정교한 문체로 시를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것은 문체가 평범한가 정교한가에 있지 않고 시가 살아 있느냐 아니면 죽었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작가를 읽을 때, 그 작가를 믿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합니다. <돈키호테>의 예를 든 보르헤스는, 돈키호테가 벌인 모험의 일부가 과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 그 자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돈키호테의 모험의 일부는 책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로서 다소 부풀려졌을 수도 있겠으나, 돈키호테의 성품 자체는 신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르헤스가 마지막 강연에서 이 점을 다시 짚고 있는 것을 보면 책읽는 이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강연 ‘한 시인의 신조’는 보르헤스의 문학적 삶에 대한 진솔한 자백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품활동 초창기만 해도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천박하다고 남들로부터 경멸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허영심의 발로일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쓸 때, 그것을 사실적으로 충실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깊은 무언가에 충실한 것을 담아내려 노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쓰는 이유는 어땠건 그것을 믿기 때문이라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단순한 역사를 믿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꿈이나 생각을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153쪽)’

젊었을 적에는 표현을 믿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망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독자도 그 자신도 생각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표현을 믿지 않고 암시만을 믿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시인으로서의 특별한 신조라고까지 할 것은 아니라고, 즉 자신은 시인으로서의 신조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강연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