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시학 /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 곽광수 옮김 / 동문선 펴냄, 2003년

[라포르시안] 이번 주에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소개하려합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을 쓴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이며 시인입니다. 특히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는 과학사연구를 통하여 데카르트적 인식론과 비뉴턴적 역학 개념 등을 도출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객관적 과학 이론의 인식론적 방해물로 개입하는 인간의 꿈과 상상력의 존재, 그 무한 깊이의 힘과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것들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문학 작품을 두루 읽어가면서 그것들에 관하여 정신분석학적으로 음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물·불·공기·흙의 4원소에 대한 독자적인 ‘물질 상상력’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프랑스 신비평 분야의 대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라고 출판사에서는 소개합니다.

바슐라르가 만년에 쓴 <공간의 시학>을 번역한 곽광수 교수는 김현 교수와 함께 <바슐라르 연구>를 저술할 만큼 바슐라르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앞에는 ‘바슐라르와 상징론사’라는 제목으로 바슐라르에 대한 옮긴이의 글을 실었습니다. 19세기말 프랑스의 평단은 그때까지 주류를 이루던 전기적 비평사조가 물러나면서 정신분석적 비평, 마르크스주의적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실존주의적 비평, 테마비평 등 다양한 경향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바슐라르의 문학사상은 테마비평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전기적 비평과 테마비평의 차이점을 곽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자가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입장인 반면, 후자는 작품을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에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비결정론적 입장이라고 하겠다.(7쪽)” 따라서 바슐라르의 입장은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한 정신분석적 비평과 마르크스주의적 비평과 대립적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공간의 시학>은 <공기와 꿈>과 함께 바슐라르의 문학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데, <공간의 시학>에서는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공간의 시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정신분석은 자체의 해석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총체적인 상징체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몽상과 추억의 뒤섞임의 복잡성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데 반하여, 몽상의 현상학은 기억과 상상의 복합체를 풀어서 분간할 수 있다(106쪽)’라는 부분입니다.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에서는 시인이 만들어낸 시적 이미지를 시인이 삶에서 경험한 특정 요소를 이끌어다 설명하게 됩니다. 인과성(因果性)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것으로, “작가의 생에의 한 요소가 원인이 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작품의 요소, 이 경우 시적 이미지가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9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얻는 과정을 보면 작가의 생애에 대한 앎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다면 결정론의 이론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시적 이미지를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과 그 시적 이미지에서 감동을 얻어낸 독자의 상상력은 반드시 일치할 이유가 없는 독자적(獨自的)인 것이라고 바슐라르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시적 이미지에 대한 바슐라르의 관념론적 상상력 이론은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상상력의 독자적인 작용이 어떻게 외계의 대상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가를 밝히는 사원소론(四元素論)이고, 둘째는 상상력의 그 독자적인 작용 자체를 밝히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며, 셋째는 상상력의 궁극성을 밝히는 원형론입니다.(10쪽)” 물론 이 셋은 전체로서의 상상 현상을 각각의 측면에서 조망하여 전체를 구성토록 하는 것입니다.

<공간의 시학>의 머리말에서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의 근본적 과제를 천착하던 자신이 시적 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취해야 할 기본입장을 설명합니다. 즉 지금까지의 지식은 물론 지금까지의 철학적 연구습관까지도 버렸다고 말입니다. ‘오직 시적 이미지를 읽는 순간에 이미지에 현전(現前), 현전해야 할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현전(現前)은 1.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다 2. 아주 가까운 장래 또는 지금, 3.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 4. 앞에 나타나 있음 등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보이는 바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의 철학이 있다면, ‘이미지의 새로움에서 오는 법열(法悅) 그 자체 가운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야하는 것(41쪽)’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적 이미지는 인과관계와는 반대로 민코프스키가 말한 ‘울림’이라는 것 가운데서 올바르게 가늠된다고 하였습니다. 울림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존재의 소리를 가지는 것이며, 이미지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하여 민코프스키의 현상학적 방식으로 그것의 울림을 체험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공간의 시학>은 모두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지막 장 ‘원의 형상학’이라는 제목에서 닫힌 공간에서 안과 밖의 의미를 수렴하고 있습니다. 집은 닫힌 공간의 안이며, 세계는 닫힌 공간의 밖이 될 것입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친근하면서도 내밀하고도 사적인 공간입니다. 집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방들과 그 방에 들어있는 서랍, 상자, 장롱 등의 사물들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Book소리에서 이미 소개한 조너선 D. 스펜서의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에서는 기억술 훈련으로 ‘궁전짓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억의 틀에 해당하는 궁전을 짓고, 그 궁전 안의 방마다 특정사물과 연관시켜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 말입니다. 기억의 궁전에 들어서 사물을 만나는 순간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도록 훈련을 하면 많은 사실들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슐라르는 집의 이미지에서 기술심리학, 심층심리학, 정신분석 그리고 현상학 등을 통합한 심리적 통합의 원리를 도출해냅니다. 집은 내부공간의 내밀함의 가치들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하기에 알맞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집안에는 우리들의 추억들뿐 아니라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들도 ‘숙박되어’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무의식이 ‘숙박되어’있는 것은 우리들의 영혼의 거소(居所)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집들’을, ‘방들’을 회상하면서 자신 안에 ‘머무르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억의 궁전을 짓고 그 안에 머물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바슐라르의 내밀한 공간은 척추동물의 상징인 새들의 거소인 ‘새집’과 무척추동물의 상징인 조개의 거소의 ‘조개껍질’로 확장되면서 상상력의 활동범위에 대한 제한을 허물어버립니다.

내밀한 공간에 대한 설명을 마친 바슐라르는 닫힌 공간의 밖, 외부 공간에서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살펴봅니다.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시학에서의 큼과 작음의 변증법을 ‘세미(細微)’와 ‘무한’을 주제로 묘사합니다. 사실 닫힌 공간 밖의 외부공간의 영역은 무한할 수밖에 없는데, 상대적으로 내부공간의 영역의 세미함 역시 무한하다는 역설이 성립되므로 두 공간의 크고 작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편가름에 익숙해진 우리네 생각으로는 큼과 작음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그저 이미지 투사의 두 극으로 다루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집으로부터 시작된 이미지의 현상학을 닫힌 공간의 밖으로 확대시켰던 저자는 안과 밖의 변증법에서 수렴하여 이를 원의 현상학으로 정리합니다. 안과 밖의 변증법을 통하여 열린 상태와 닫힌 상태라는 개념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즉 마지막 장, ‘원의 현상학’에서 저자는 기하학적 원리에서 벗어나 둥긂의 내밀함이나 둥긂의 이미지를 발견해낸 것입니다. 즉 ‘원의 현상학’을 통하여 바슐라르는 “메타포의 주지성(主知性)을 폭로하고 따라서 다시 한 번 순수한 상상력의 고유한 활동을 드러낼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슐라르가 개별 주제에 맞는 시적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다양한 시의 일부분이나 소설의 내용들이 많은 부분 우리에게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바슐라르의 설명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깊은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시작품의 경우는 전체 시를 읽고 음미해도 그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한 느낌이 남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평범해 보이는 이미지에 담긴 의미를 전하기 위하여 길게 부연설명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미지라는 것이 정적이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릴케의 <서한선>에 나오는 ‘오 잠든 집의 불빛이여!’라는 시구(詩句)로부터 바슐라르는 밤 가운데 먼 지평선에 서 있는 오두막이 밝힌 등불의 이미지를 통하여 은신처의 응축된 내밀성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시구만으로는 이런 설명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선한선>의 ‘내면일기초(內面日記抄)’에 나오는 릴케의 묘사를 인용합니다. 릴케와 두 동행인은 깊은 밤 가운데 ‘저 멀리 한 오두막집, 마지막의 오두막집, 들판과 늪들을 앞에 두고 지평선에 홀로 있는 오두막집의 불 밝혀진 창문을 발견한다.’ 외로워 보이는 불빛을 본 릴케는 ‘우리들은 고렇게 아무리 가까이 있었어도 소용없었다. 

우리들은 처음으로 밤을 보는 고절된 세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120쪽)’ 이쯤 되어서야 책읽는 이는 ‘우리들은 고독에, 외로운 집의 시선에 최면당하는 것이다.’라는 바슐라르의 설명에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슐라르를 전공한 옮긴이가 10여년 매달려 번역을 마치고는 머리를 내흔들었다고 한 것을 보면 번역도 어려운 만큼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책읽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이미지의 의미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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