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10년쯤 전에 큰 병을 앓았다. 한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자마자 퍼뜩 떠오른 건 치료 걱정이 아니었다. '돈' 걱정이 앞섰다. 치료비로 들어갈 비용은 얼마나 나올지, 직장은 계속 다닐 수 있을지….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허둥지둥 병원을 나오면서 민간보험에 가입된 게 뭐가 있었나 그것부터 찾아봤다. 치료는 나중 문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30대 중반이었고 막 돌을 지난 아이가 있었다. 앞뒤 잴 것 없이 내 몸보다 가족의 일상을 유지하는 게 가장 큰 사명처럼 여겨졌다. 그것이 무너지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큰 위기를 잘 넘겼다.    

한국 사회에서 큰 병에 걸린다는 건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중증질환으로 노동력을 상실하고 직장을 잃으면 빈곤층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낮은 상태에서 질병으로 인한 높은 진료비 부담과 소득 상실의 이중고는 빈곤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렇기에 큰 병에 걸리면 치료가 아니라 돈 걱정부터 떠올려야 하는 게 서글픈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지난해 4~5월 사이 일반인 406명을 상대로 '자신에게 발생할까 걱정하는 질환'을 물은 결과 암이 13.6%로 가장 많았다. 암 발생을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료비 부담' 때문이었다. 암 환자들도 '현재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경제적 요인(37%)을 꼽았다.

생계형 건보료 체납자 모임에서 나온 건보료 관련 당사자 의견들. 이미지 제공: 아름다운재단
생계형 건보료 체납자 모임에서 나온 건보료 관련 당사자 의견들. 이미지 제공: 아름다운재단

아파도 삶의 고단함은 계속된다. 환자라고 봐주질 않는다. 아프기 전의 일상을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 부양할 가족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나마 건강보험의 중증질환 보장성이 확대돼 치료비 부담을 어느 정도 덜 수 있게 됐다. 문제는 경제 활동의 위축에 따른 소득상실이다. 암에 걸리면 직장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지간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아니라면 당장 진료비 지출에 소득상실의 이중고와 직면하면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선 것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질병의 고통과 생활고에 허덕이는 '메디컬 푸어'(Medical Poor)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건강보험제도 상에 문제가 많다.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6개월 이상 보험료를 체납하면 급여가 제한된다. 이런 식으로 건강보험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가구가 200만 세대를 넘는다고 한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작년 4월부터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실태조사 및 제도개선 연구’를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건강보험 장기체납자는 대표 납부의무자 기준으로 216만 세대에 달했다. 가구원수로 보면 약 405만명 정도가 건강보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는 셈이다. '전국민 건강보험시대'라는 표현이 무색할 지경이다.

장기체납자의 56.7%는 월 소득이 80~90만원 수준으로 월 5만원 이하 보험료를 내는 ‘생계형 체납자’였다. 보험료 내기가 너무 버거워 체납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빈곤층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가족의 납부 의무를 계승한 영유아 등의 미성년자와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하는 청년층 체납자도 5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료를 6개월 이상 체납했다고 병원 이용을 막는 건 아니다. 다만 보험료 장기체납으로 급여제한 대상자가 된 이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경우 적용받은 건강보험 급여비를 '부당이득금'이란 명목으로 나중에 환수해 간다. 생계형 체납자는 밀린 보험료에 부당이득금 환수까지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기체납으로 급여가 제한되면 스스로 병원 이용을 자제하게 된다. 아파도 참다보면 병을 키울 수도 있지만 나중 문제다. 당장의 돈 걱정이 먼저다.

건보료 장기체납은 단순히 건강보험 급여 제한으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다. 지속적으로 보험료 납부 독촉에 시달려야 하고, 심지어 통장압류로 금융생활에 제약까지 받게 된다. 체납자는 그 과정에서 자책감과 분노, 모욕감을 겪게 된다. 또한 건강보험공단에 체납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심적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이쯤되면 전국민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공적부조로서 사회보험제도가 오히려 체납자의 생계를 위협하고, 삶의 존엄성을 짓밟는 도구가 된다.

가장 큰 문제는 건강보험 체납이 취약계층의 의료이용을 제한하고, 생계를 위협함으로써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개미지옥'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건강보험공단은 보험료 성실 납부자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체납자 구제보다는 보험료 징수 업무에 더 적극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아동복지시설에 거주하는 영유아한테 밀린 보험료를 내라고 독촉장을 보낼 정도로 공단은 징수 업무에 충실하다. 심하게 말해서 보험료 체납자에게 이런 공단의 모습은 추심업자와 다를 바 없다. 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건강보험체납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개선 토론회'에서 건보공단 징수업무 관계자는 "의료보장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체납자의 각종 결손처분과 구제를 위한 지원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성실 납부자를 위해 체납보험료 징수도 공단이 해야할 주요 책무"라고 강조하는 걸 빼먹지 않았다.

진짜로 공단이 해야 할 책무는 따로 있다. 실직 등으로 소득이 없거나 낮아 보험료를 내기 힘든 처지의 지역가입자에게 성·연령, 자동차, 주택에 보험료를 부과하는 불합리한 부과체계부터 하루빨리 개편해야 한다. 생계형 체납자 가운데 상당수가 소득상실 상태나 다를 바 없는 빈곤층임에도 지속적으로 보험료가 부과돼 체납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급기야는 체납보험료 청산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으로 내몰린다. 저소득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을 경감하고 의료사각지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자격구분을 폐지하고,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개편해야 한다.

보험료 부과체계 개편과 함께 '상병수당' 도입도 시급한 과제다. 상병수당이란 업무상 질병 이외에 일반적인 질병 및 부상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상실되는 소득 또는 임금을 현금수당으로 보전해 주는 급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국가는 의료보험이나 다른 공적보장 형태로 상병수당을 제공한다. 산업재해가 아니라  암과 같은 중증질환으로 소득능력을 상실했을 경우 건강보험에서 상병수당을 제공함으로서 의료비 부담과 함께 실직으로 인한 소득상실의 이중고를 덜어줘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2006년 작성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안'을 통해 "상병수당의 의무급여화 등을 통한 건강보험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 모든 국민의 건강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는 건 인권의 문제이자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일이다. 대선을 겨냥해 유력 후보들이 제안하는 '기본소득'보다 상병수당 도입이 더 절실하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