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대안,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 발간

[라포르시안]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불법 임신중절수술(낙태)을 한 의사에 대한 행정처분 강화를 추진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여성·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형법상 ‘낙태죄’ 규정의 폐지 촉구 운동이 촉발됐다.

왜 낙태의 경우 여성만이 처벌 대상일까, 왜 임신에 대한 여성 자신의 결정은 불법으로 치부돼야 하는 걸까.

여성계는 "더 이상 국가의 인구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안에서 인공임신중절 사유를 허락받는 상황을 두고볼 수 없으며, 임신중절에 대한 비범죄화를 기초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죄’ 폐지 요구의 공론화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피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젠더건강팀은 최근 서울시 여성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을 제작했다.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은 ▲당신을 위한 피임 ▲피임의 정석 ▲실전 피임 ▲피임에 대한 오해와 진실 ▲피임과 재생산 : 여성의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 등의 소주제로 짜였다.

피임사전 발간 작업에는 의료 전문가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지금까지 생산된 피임법 정보에서 여성주의 관점이 부족했던 문제들을 고려해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은 여성의 입장에서 보다 즐거운 성 생활과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이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담았다.

특히 피임사전의 5장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피임'에는 ▲피임을 둘러싼 역사와 쟁점 ▲당신이 알아야 할 ‘재생산권’▲왜 한국은 피임을 지원하지 않을까? ▲우리가 원하는 성교육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피임이 어떻게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했는지, 그리고 여성의 건강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 지를 세세하게 다뤘다.

특히 한국에서는 1960년대~90년대까지 인구 억제와 경제발전이란 명분 아래 '가족계회사업'이 지속되다 2000년대 이후 저출산 문제가 심화되자 사문화된 '낙태죄'를 부활시키고, 저출산을 여성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에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이 어떤 피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1년 시작되어 1996년에 종료된 국가정책인 가족계획사업의 목적은 인구 억제와 경제발전이었습니다.……(중략)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가족계획을 국가시책으로 채택하면서 피임약과 기구의 국내 생산과 수입금지 조치를 풀었습니다. 정부는 무료 난관시술, 특별 생계비 지급, 주택자금 우선 융자 등 각종 특혜를 부여하면서 단산 시술을 유도하였으며 가족계획 요원들은 각자 할당 받은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시술 희망자를 모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하게 시술을 강요했고, 이로 인한 불임이나 부작용 등 여성 건강에 미친 악영향도 컸습니다.

한국 정부는 가족계획 사업에서 지속적으로 여성 피임법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1988년 이전까지 콘돔의 사용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콘돔 사용률이 10% 수준으로 올라간 것은 1988년 성병과 에이즈 예방 차원에서 정부가 콘돔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기 시작한 이후입니다.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여성’을 타겟으로 한 것이지요. 국가가 보급한 피임수단은 압도적으로 여성용이 많았으며, 남성이 피임을 실천하도록 설득하거나 피임수단을 보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여성에게 피임의 책임을 전가하는 불평등한 상황이 지속되는 이유가 짐작되시나요?"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 중에서>

'여성의 재생산권'에 관해 소개하면서 임신에 대한 여성 자신의 결정을 불법으로 다루는 '낙태죄'가 어떤 문제를 담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UN이나 WHO와 같은 국제기구에서는 임신, 출산, 성과 관련한 어떠한 여성의 결정도 불법화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더불어 여성의 인권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북경세계여성대회에서는 임신, 출산, 성과 관련해서 어떠한 “권리”가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지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재생산권은 임신/출산의 여부, 시기, 빈도 등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 보건서비스에 접근할 권리, 안전하고/효과적이고/쉽게 구할 수 있는 가족계획에 대한 정보 및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포함합니다. 나아가 만족스럽고 안전한 성생활을 누릴 권리, 건강할 권리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 중에서>

건강과대안은 피임사전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선진국처럼 피임에 대한 지원을 정책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미국은 지난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건강보험 개혁법을 통해 사후피임약을 포함한 피임을 건강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피임약, 루프, 임플라논에 대해 최대 65% 정도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국가건강보험에서 저소득층이나 취약계층을 위해 경구피임약 및 루프에 대한 비용을 전액 지원한다.

청소년을 위해 피임법을 지원하는 국가도 많다. 독일은 18세 미만의 청소년에 대해 의사의 처방을 받은 피임법을 전액 지원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와 덴마크 등의 국가에서는 청소년에서 경구용 피임약과 콘돔 등 피임기구를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피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이 들어가고, 여성 건강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라는 관점에서 다른 선진국처럼 우리도 피임에 대한 지원을 정책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과대안은 "피임사전은 개인에 따른 적합한 피임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들을 담고 있으며, 피임에 관심있는 개인 뿐만 아니라 관련 기관들과 복약 지도가 필요한 진료 현장에서 교육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획·제작됐다"며 "상업화되고 젠더 불평등한 의료정보의 범람 속에서 피임사전이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안내서가 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한편 건강과대안은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 1천부를 전국 여성단체 및 성교육, 청소년단체, 성폭력피해상담기관, 그리고 사전 신청을 요청한 개인들에게 무료 발송했다.

책자로 제작된 인쇄물 외에도 건강과대안 홈페이지(http://www.chsc.or.kr/)를 통해 피임사전 전문을 PDF로 내려받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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