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불멸주의자 /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지음 /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불멸의 존재가 화젯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요즈음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신(神)도깨비>의 주인공 김신은 고려말 장군인데 환관의 음모로 죽음을 당하고 935년 동안 불멸의 존재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산 사람이 아니니 불멸을 논할 대상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멸을 끝낼 도깨비신부를 애타게 찾아온 것을 보면 불멸의 존재 도깨비가 죽음을 그리는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필멸의 존재이나 불멸을 꿈꾸었던 진시황이었다면 이런 도깨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불멸을 끝내려던 도깨비가 불멸을 끝내줄 수 있는 도깨비신부를 만나고서는 생을 연장하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는 합니다.

불멸의 존재가 죽음을 선택한다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 <알레프>에 실린 첫 번째 단편 ‘죽지 않는 사람’의 주인공이 불멸의 존재가 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재위기간; 284년 ~ 305년) 휘하의 군단 사령관이었습니다.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갠지스 강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있다는 인간을 죽음에서 깨끗하게 하는 비밀의 강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불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아 나섰고, 결국 그 강을 찾아 물을 마시고 불멸의 존재가 되어 세상을 떠돌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그가 20세기 초 에리트레아 해안의 어느 도시 외곽에 있는 샘물을 마시고 다시 죽는 존재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불멸의 존재가 되었던 그가 다시 필멸의 존재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죽지 않는 존재와 죽는 존재를 모두 살아본 그는 두 가지 형태의 삶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니는데 반하여,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불멸의 존재인 인조인간이 사랑하는 여인이 죽음을 맞게 되자 살아갈 의미를 잃고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사랑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위대한 힘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불멸의 존재가 필멸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필멸의 존재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불멸을 꿈꾼다는 것처럼, 불멸의 존재 역시 필멸의 존재처럼 무언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픈 불멸주의자>의 저자들은 인간이 불멸을 꿈꾸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며, 죽음의 공포는 역설적으로 예술, 종교, 언어, 경제, 과학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공포관리이론’을 세우고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등 세 명의 저자는 1970년대 말에 캔자스대학에서 실험사회심리학 박사과정에 등록하면서 만났는데,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이해하려는 열망을 공유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를 공통의 주제로 연구해왔습니다. 1980년대 초에 어네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을 만나게 된 것이 ‘공포관리이론’을 가다듬는데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베커는 “인간 행위는 죽음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하였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근원적으로 무력하다는 통렬한 인식을 바탕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덕성과 문화를 연마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들이 베커의 이론을 바탕으로 ‘공포관리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사회심리학 전공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기도 했는데, 사회학, 인류학, 실존철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의 연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설은 어느 정도 타당해보이지만 이론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심리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공포관리 이론은 심리학은 물론 타학문에서도 수많은 연구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사실이 가장 고귀한 인간의 행동이나 가장 비도덕적인 인간행동 양쪽 모두의 바탕을 이루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통찰이 어떻게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진보로 이루어질 수 있는 지 고찰하는 것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류학, 고고학 등 타 학문 분야에서 거둔 연구 성과를 망라하며, 과거와 현재의 구분 없이 관련된 사례라면 그 검토결과를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저자들이 서문에서 요약한 것을 토대로 설명하면, 이 책은 모두 11개의 장을 3개의 부로 구성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관리하기, 사물체계, 자존감-굽히지 않는 용기의 토대 등 3개의 장으로 된 제1부 ‘공포관리’에서는 공포관리이론의 기본 원리와 공포관리의 양대 기둥이라 할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을 소개합니다. 호모 모르탈리스, 실제 불멸성, 상징적 불명성 등 3개의 장으로 된 제2부 ‘세월을 관통하는 죽음’에서는 ‘우리 선조에게 죽음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발생했는가’와 ‘그들은 죽음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고대사를 탐구하였습니다. 인간파괴 해부, 육체와 영혼의 불편한 동행, 가깝고도 먼 죽음, 방패의 틈,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 등 4개의 장으로 된 제3부 ‘현대의 죽음’에서는 언젠가 죽는다는 암시가 개인 및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고, 아울러 현대 세계를 이해하고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처할 때 이 이론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았다고 합니다.

동물도 죽을 때를 안다고 합니다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성을 갖추면서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생긴 실존적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마련에 나섰던 것입니다. 바로 문화적 세계관이라는 개념입니다. 종교를 통하여 영혼이 새로운 형태로 환생한다고 믿게 되었고, 인간이 창조한 다양한 문화적 유산은 자손을 통하여 존속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불멸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관리이론의 두 축,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 불멸과 상징적 불멸을 이루려면 스스로가 문화 안에서 꼭 필요한 일원이라고 느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에 극복하는데 있어 자존감이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존감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발보아 고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무료급식의 사례를 인용합니다. 이 학교의 무료급식 대상 학생들 가운데 37%만이 급식을 먹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돈이 있는 아이들은 급식실에서 팔고 있는 피자 같은 음식을 사먹더라고 무료급식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제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점심을 먹였는데, 형편이 되는 집에서는 급식비를 내지만 형편이 안되는 집에서는 급식비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구분 없이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급식비를 면제받는지는 선생님들만이 아는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하고 있는 전체 학생 무료급식제도는 잘못 설계된 것입니다. 급식비를 낼 형편이 되는 아이들로부터 급식비를 받아 음식의 질을 높이는데 쓰게 된다면 급식을 먹지 않은 아이들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료급식이라는 허울 좋은 정책이 아니라 질 좋은 급식을 모든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저자들은 의례, 예술, 신화, 종교 등의 순서로 발전하면서 문화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진화과정에서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인간들이 비탄한 감정을 덜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시작한 의례를 초자연적 존재에게 희망사항을 기구하는 형태로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노래 춤으로 시작하였을 의례는 상황이 어려울 때는 희생물을 바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어서 예술이 등장하게 되는데, 예술 역시 현실세계를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초자연적인 세계의 존재를 구체적 표상으로 보여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의례와 예술은 신화를 창조하고, 궁극적으로는 종교로 발전시켰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의례, 예술, 신화, 종교 등을 인류의 인지적응 과정이 낳은 불필요한 부산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인간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낳은 이 산물들은 초기 인류가 ‘죽음 인식’이라는 인간 고유의 문제에 대응하는데 반드시 필요했다.(1345쪽)”라고 단언합니다.

실체적 불멸을 추구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고대나 현대에도 달라진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연금술을 통하여 불사약을 만들던 옛날 방식이 있는가 하면, 현대에는 불멸이 가능할 때까지 죽은 자를 냉동시키려는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의 사례도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연장이 일부에서 가능해지기는 했지만, 실체적 불멸은 여전히 요원한 수준입니다. 그런가 하면 상징적 불멸은 어느 정도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에서도 실체적 불멸을 대체할 상징적 불멸을 인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는 노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군사, 정치, 경제, 과학, 운동, 문학, 예술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특출함을 드러내 명성을 얻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역설적으로 범죄행위로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히틀러나 기원전 356년 그리스 에페소스의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 역시 인류 차원의 범죄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그렇다고 쳐도 헤로스트라투스는 생소할 수도 있는데, 그는 단지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다고 하는 이유로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 꼽히던 아르테미스신전에 불을 지른 청년입니다. 2008년 남대문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채종기씨의 이름이 가물거리고 있지만, 헤로스트라투스는 사건 당시 에페소스의 관리들이 인류의 기억에서 지워야 할 이름으로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름이 전하는 것을 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명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심리학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고 합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중심방어기제를 활성화시켜 죽음이라는 불편한 생각을 억누르거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죽음이라는 문제를 먼 미래의 일로 미룬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말단방어기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이 경우 죽음이라는 문제와 아무런 논리적, 의미론적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문화적 가치를 거부하는 타인을 폄하하거나 자존감을 북돋우려 하는데,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상징적 불멸성을 획득하여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죽음의 공포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중심방어기제와 말단방어기제는 동시에 작동합니다.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방패에도 틈이 있는 것처럼 빈틈이 없을 듯한 죽음의 공포에도 틈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뻔한 적이 있는 사람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노년층은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물질적 부유함보다는 친밀한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덜 두려워하고, 이에 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한다면 죽음과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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