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세계사 / 미야자키 마사카쓰 지음 / 오근영 옮김 / 다산초당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대중의 관심이라는 것이 끈기가 없는 탓인지 쉽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위 ‘먹방’이라고 하는 방송계의 추세는 꽤나 오래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을 대체할만한 소재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먹방타령으로 Book소리를 시작하는 이유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역사도 시각에 따라서 전혀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야자키 마사카츠의 <공간의 세계사>는 ‘공간’을 주제어로 5,000년 인류사의 변곡점을 찾아냈습니다. 즉 공간의 변화가 인류의 삶을 바꾸는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사 교사를 역임하면서 20년 넘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집필과 편집에 참여한 저자의 경력을 보면 역사를 깊이 연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등학생 대상의 세계사를 다루다보니 그의 전작,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등처럼 세계역사의 변화를 쉽게 이해하는 길을 모색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서문에는 세계사를 공간의 개념으로 접근하게 된 이유를 적었습니다. 그 첫 단추는 ‘세계사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눈다면 그 분기점은 어디가 될까?’라는 질문입니다. 저자는 15세기 대항해시대가 바로 그 시기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2세기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작한 세계지도와 1570년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지도출판업자 오레텔리우스가 제작한 <세계의 무대>를 근거로 내놓았습니다. 지도 제작자가 이해하던 당시 세계의 범위가 담겨있는데, 프톨레마이우스의 지도를 ‘육지의 세계지도’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세계지도와 흡사한 오르텔리우스의 지도는 ‘바다의 세계지도’로 비유했습니다. ‘바다의 세계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항해시대에 세계를 누빈 탐험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20세기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육지와 바다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는 ‘세계사는 육지 나라에 대한 바다 나라의 투쟁, 바다 나라에 대한 육지 나라의 투쟁을 기록한 역사다’라는 관점으로 <육지와 바다>를 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과연 육지나라 독일이 바다 나라 영국을 상대로 잘 싸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였고, 결론은 ‘바다 나라 영국이 우위에 서지 않을 수 없다’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일본이 우위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슈미츠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했다는 결과에 매몰되어 역사해석에 있어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의 주제어가 되는 ‘공간혁명’은 슈미트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큰 시대의 시작에는 늘 큰 토지의 취득이 있다”라고 전제하고, “먼저 공간 규모가 크게 변화하고 이어서 그에 걸맞은 공간질서의 형성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공간혁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사의 전환은 공간의 변화와 결부되어 있고, 그것이 광범위하고 핵심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사카츠는 슈미츠의 공간혁명의 개념을 세계사의 구성개념으로 응용하여 여섯 번의 세계사적 공간혁명으로 7개의 세계사 공간을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 건조 지대 큰 강 유역에서 거대한 농업공간 형성(약 5,000년 전), 두 번째, 말을 이용하는 유목민들이 이끈 큰 강 유역과 초원․황무지․사막의 공간적 통합에 의한 여러 지역세계 형성(약 2,500년 전), 세 번째, 이슬람 제국에서 시작되는 기마유목민과 상인에 의한 유라시아 규모의 공간 통합(약 1,400년 전), 네 번째, 대항해시대 이후 대양이 대륙을 잇는 대공간의 성장과 자본주의 등을 바탕으로 한 근대체제의 형성(약 500년 전), 다섯 번째,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철도와 증기선에 의한 지구공간의 통합(약 200년 전), 여섯 번째,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 규모의 전자공간 형성(약 20년전) 등입니다. 각각의 혁명에는 유발요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강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말이, 네 번째는 항해가, 다섯 번째는 자본이 그리고 여섯 번째는 전자가 공간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견강부회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나름대로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체적으로 ‘혁명’이라는 개념은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진대 첫 번째 혁명 거대한 농업공간의 형성이 단 기간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것과 굳이 건조지대라는 지역적 제약을 두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류의 4대문명 발상지로 꼽는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과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유역의 인더스 문명, 그리고 중국 황하유역의 황하문명 등은 기원전 4,000부터 ~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성립하였습니다. 거리상 가까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서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더스문명이나 황허문명은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4대 고대문명은 큰 강의 유역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며, 청동기, 문자, 도시 국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조건도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 온화하고 강수량도 많았다는 점도 공통점입니다. 따라서 큰 강 유역이라는 공간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지형적 요인에 따라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이룬 것으로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표 출처: '공간의 세계사' 중에서
표 출처: '공간의 세계사' 중에서

두 번째 혁명은 기원 전후로 걸쳐 일어난 것으로 4대문명이 일어난 공간을 중심으로 세력이 확장되거나 통합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시기의 주인공들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1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마우리아왕조의 찬드라 굽타, 진의 시황제를 들었습니다. 물론 이 무렵 공간의 확산과 통합에 말이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제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페니키아 사람들은 배를 만들어 지중해를 통하여 이베리아반도를 지나 대서양으로 진출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미 인류의 활동영역은 육지를 떠나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혁명을 주도한 세력을 기마민족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배라는 이동수단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혁명을 통하여 성립한 공간들은 상호 교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혁명은 7~14세기 아랍인, 튀르크인, 몽골인에 의하여 유라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이 탄생하던 시기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아랍인들이 살던 아라비아반도나 튀르크인들이 살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사막기후로, 몽골인들이 살던 몽골고원 역시 건조지대로 극한의 땅에서 생활하는 유목부족들이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품은 강한 의욕이 일련의 공간혁명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지나 이베리아반도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반도, 동쪽으로는 인도 접경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카스피해 등에 이르는 이슬람의 강역이 극한의 땅이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제국의 중심은 시리아 혹은 바그다드 등으로 극한의 기후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튀르크인 역시 중국의 북부 초원지역에 살면서 중원을 침략하던 것을 중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북부지역에 살던 흉노족이나 돌궐족을 서쪽으로 밀어낸 결과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몽공인들은 중국의 지배세력이 약해져 분열되었던 시기에 세력을 키워 중원을 장악하였고 유럽의 접경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루었지만, 강역을 실지 경영하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고 분할 지배했던 것입니다.

네 번째 혁명, 대항해시대가 촉발된 원인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대항해시대는 유럽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포르투갈이 문을 열고 스페인이 뒤를 이었습니다. 두 나라가 대서양으로 나간 것은 중동에 자리한 오스만제국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는 베네치아공화국을 파트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무역에 끼어들 틈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동방항로를 개척하였고 덤으로 브라질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스페인은 동인도제도와 라틴아메리카를 차지하는 성과를 이룬 것입니다.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를 차지할 수 없었다면 유럽이 유라시아대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어떻거나 대항해시대에 유럽제국이 이룩한 세계사적 공간통합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가끔은 작가의 시각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세계사 속의 한국과 일본의 위치에 관한 언급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자료선택에 있어 중립적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한 것이나, 고구려가 낙랑군을 313년에 축출한 뒤로 한반도에 백제, 신라 등 국가형성의 움직임이 있었고, 일본은 야마토 왕조가 탄생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성립한 고구려가 100만 대군을 동원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16세기 동아시아로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과 접촉한 과정도 소략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콜럼버스의 대서양 개척이 지팡구, 즉 일본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한 섬을 포함한 지역을 서인도제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또한 남북 아메리카대륙의 문명은 아예 세계사 공간에서 제켜두었다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사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데 그마저도 유럽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최근의 고고학적, 역사학적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유럽 중심이 아닌 원주민 시각의 해석으로 세계사의 공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항해시대를 통하여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다섯 번째, 산업혁명을 이루어낸 것도 유럽사회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는데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철도와 증기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의 운송수단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것도 유럽이었기 때문입니다. 운송수단에 의한 공간의 통합이 유라시아-아프리카 대륙을 넘어 전지구적 공간으로 확대된 것도 당연히 유럽이 중심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사회는 축적된 인적, 물적 자산을 탕진하면서 통합된 공간을 지배할 능력을 미국과 소련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지구적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다양한 공간으로 쪼개지면서 공간들 간에 무수한 충돌이 일어났던 것도 빠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혁명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 규모의 전자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전자공간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국이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자공간의 활용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참여하고 있으니 전자공간 역시 지구적 공간처럼 ‘함께 또 같이’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자공간이 성립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임에도 이 부분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포함하는 20세기의 세계사를 포함시킨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아마도 전자공간에 대한 개념형성이 논의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축국으로 참여한 군국주의 일본의 오판이었다는 정도로 요약합니다.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6.25동란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1950년에는 무력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노린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공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368쪽)”고 적고 이 전쟁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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