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 파울로 코엘료 지음 /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2008년

[라포르시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행지에 관련된 책 말고도 생각해볼 거리가 있는 책도 함께 가져갑니다. 책읽기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도 되고, 여행을 통하여 얻은 느낌과 딱 맞아 떨어지는 대목을 발견하는 경우 여행기를 적을 때 도움이 되어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지난 9월 동유럽여행길에 가져간 책인데, 라포르시안에서 소개할 짬을 만드느라 글쓰기가 늦어졌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3년 전에 그의 데뷔작 <순례자>를 북소리에 소개하면서 만난 바 있습니다. 스페인을 다녀와서 <연금술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유명세에 비하면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194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그는 록 음악 작곡가로서 브라질 음악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저널리스트, 록스타, 극작가, 세계적인 음반회사의 중역 등 다양한 이력을 거쳤는데, 1986년 돌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순례 이후 첫 작품 <순례자>를 썼고, 이듬해 <연금술사>를 발표하여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그가 삶을 통하여 직접 겪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여행을 하면서 얻은 생각들을 적은 것으로, 이 가운데 전 세계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글 ‘방앗간 집에서의 하루’를 피레네에서 쓴 것처럼 글 역시 다양한 곳에서 쓰인 것들입니다. 40세가 되어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이 책의 프롤로그를 보면 그는 이미 열다섯에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작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조사에 착수하였고, 작가라는 존재에 대하여 여덟 가지의 정의를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작가는 자기 세대로부터 절대 이해받아서는 안 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라는 제법 심각한 것도 있지만, “작가는 여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마다 냅킨에 시 한 편을 써서 건네며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작가입니다.’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다”라는 대목에서는 웃긴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 101꼭지의 글을 모았습니다. 제목처럼 생각이 그저 흐르는 대로 맡기라는 의미였는지 특별하게 정해진 바가 없이 글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글을 쓴 순서라거나, 주제에 따라 나누었다거나, 하다못해 자모순으로 나눈다는 규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서가 없으니 처음부터 읽어도 좋지만,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치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 주제로 나뉘었다고 해도 모든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101 개나 되는 글에 대한 느낌을 모두 적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읽다가 눈에 띄어 무언가 한 마디를 남기고 싶은 경우만 짚어볼까 합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느낌이 있는 대목에는 표시를 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백에 느낌을 적기도 했습니다만, 다시 읽을 때 여백에 적힌 느낌 때문에 새로운 느낌을 얻지 못하는 것 같아 이 버릇을 버렸습니다. 그 뒤로는 귀퉁이를 접었다가 나중에 따로 독후감을 쓰기도 했는데, 왠지 책이 아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종이를 잘라 만든 띠지를 끼워 넣기도 했는데, 십여 년 전부터는 다시 떼어 쓸 수 있는 견출지를 붙이곤 합니다. 물론 독후감을 쓴 다음에는 다시 떼어내 재활용을 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첫 번째 견출지를 붙인 글은 세 꼭지나 할애한 마누엘에 관한 글입니다. 첫 번째 글은 마누엘이 바쁘게 사는 이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누엘은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입니다.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자, 책임감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마누엘에게 천사는 이렇게 일렀다고 합니다. “하루에 십오 분만이라도 일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과 자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없나? (…) 노동은 축복이라네. 그곳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러나 일에만 매달려 삶의 의미를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저주야.(73-76쪽)” 저자는 일에 대한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돌아볼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일깨웁니다. 

그런 마누엘이 퇴직을 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일 이외의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누엘은 서글퍼집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사회와 가족을 위해 헌신했는데도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누엘에게 천사는 “자네는 인생에서 무엇을 일구었나? 꿈꾸던 인생을 살았나?(79쪽)”라고 묻습니다. 마누엘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럴까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가장 좋은 순간이 아닐까요? 

우울증에 빠져 살던 마누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코엘료는 헨리 드루먼드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에 적은 “우리 삶의 정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리고 마누엘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의 마누엘은 죽는 순간 구원을 얻었다. 비록 삶의 의미를 묻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양했고,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했으니.(82쪽)” 그렇습니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면 거창해 보이는 삶의 의미까지는 몰라도 좋은 삶을 살았다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행길에 읽었으니 아무래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에 눈길이 갔던 것 같습니다. ‘다르게 여행하기’라는 글은 제목까지도 독특한 것 같습니다. 코엘료는 철들기 전부터 최고의 배움은 여행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이순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늦되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떻든 코엘료가 조언하는 다르게 여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박물관을 피한다, 2. 술집에 간다, 3. 마음을 열자, 4. 여행은 혼자서 가되,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와 간다, 5. 비교하지 말자, 6. 모두가 우리를 이해한다는 것을 이해하자, 7. 너무 많이 사지 말자, 8. 한 달 안에 전 세계를 다 보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9. 여행은 모험이다, 등입니다. 

적고 보니 꽤 많습니다. 그리고 공감이 되는 점도 있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든 코엘료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것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여행을 보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직’을 화두로 한 글은 고대 중국의 왕실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왕자비 간택령이 내려지자 궁에서 오래 일을 해온 여인의 딸도 나섰다는 것입니다. 간택이 될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오랫동안 사모해온 왕자님을 지근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왕자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택에 나선 처녀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왕자님의 준 씨앗으로 여섯 달 안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처녀가 왕자비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처녀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지만 화분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처녀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 화분이지만 왕자님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궁궐로 갔습니다. 다른 처녀들은 저마다 멋진 꽃이 자란 화분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지목한 사람은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 화분을 가져온 처녀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자님이 나누어준 씨는 싹을 틔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녀야 말로 ‘황후의 미덕, 바로 ’정직‘이라는 꽃을 피워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미래의 황후가 될 왕자비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정직‘이라는 생활태도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앎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도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터널이나 다리의 준공식 장면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글도 흥미롭습니다. 모든 준공식에는 발주처와 시공처 대표, 정치인이나 고위층 인사들이 하객들과 함께 서서 준공테이프를 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코엘료는 겉으로 보이는 준공식의 장면에서 공사 중에 땀흘려 일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제나 생색은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내지만, 그래도 자신만이라도 보이지 않는 얼굴, 명성도 영예도 쫓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그 얼굴들을 지켜보는 사람이기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였던 아이다 미쓰오의 걸작 시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대목일 듯합니다. “(…) 꽃은 그저 한 송이 꽃일 뿐이나 / 혼신을 다해 제 소명을 다한다. / 외딴 골짜기에 핀 백합은 /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 

저 역시 얼추 30개국에 걸쳐 헤아릴 수 없는 도시를 가보았기 때문인지 ‘죽은 후의 세계일주’라는 글을 읽으면서 공감과 의문이 같이 들었습니다. 코엘료 역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만큼 “우리의 몸을 세계 도처에 뿌려두면 어떨까. 만약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낯익은 무언가를 찾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독특한 장례절차를 치른 미국여성의 이야기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오리건주 메드퍼드에서 보낸 미국 여성은 정년퇴직을 하면 세계를 돌아보는 꿈을 키우며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뇌졸중에 폐기종까지 겹쳐 꿈을 이룰 수 가능성이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살고 있는 콜로라도로 가는 마지막 여행을 앞두고 자신의 장례절차에 관하여 중대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화장한 뒤 유골을 241개의 작은 주머니에 넣어 미국 50개주와 전 세계 19개국의 우체국장 앞으로 보냈습니다. 고인의 뜻을 밝히고 유골을 고이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동봉하였습니다. 그녀의 유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청을 정중하게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생명부지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형식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아메리카 어느 고아원의 수녀님은 일주일 동안 고인을 위해 기도를 드린 뒤 정원에 유골을 뿌렸고, 고인을 고아원 아이들의 위한 수호천사로 모셨다고 합니다. 고인의 아들은 다섯 개 대륙, 모든 인종과 모든 문화권으로부터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존중해준 사람들의 사진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인은 평생의 소원대로 자신의 몸의 일부일망정 항상 꿈꿔온 곳에 가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코엘료는 이 이야기에서 고인이 독특한 꿈을 가진 것도 대단하지만, 아직도 우리 인간들의 영혼에 존경과 사랑과 관용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생각에서 희망을 부풀리게 만든다고 적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코엘료의 열린 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이르게 된 경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를 지적하는 ‘근거 없는 믿음’들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1. 마음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다, 2. 육식은 깨달음을 멀리하게 한다, 3. 신의 본질은 희생이다, 4. 신에게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가톨릭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코엘료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행동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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