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덕(하버드신경과의원 원장, Brainwise 대표이사)

[라포르시안] 치매라는 질병은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장에서는 치매를 앓은 유명 정치인들과 치매와 관련이 있는 정치적 사건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 February 4~11, 1945)=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2월,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와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이 크림반도의 해안에 위치한 소련 휴양도시 얄타에 도착한다. 연합군 국가 수반으로서 전후 동유럽 문제, 태평양 전쟁, 새로운 국제연합의 구성, 극동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을 찾아간 것이었다. 

의사들을 극도로 불신하여 수많은 의사를 숙청했던 스탈린은 멀리 여행하는 것은 건강에 해로울 것이라는 의사들의 경고를 핑계로 루스벨트와 처칠을 설득하여 소련영토에서 만나기로 했다. 실상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장거리 여행을 하도록 만들어 미국과 영국의 소통을 둔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얄타 회담에 참석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 당 서기장.<사진 왼쪽부터>
얄타 회담에 참석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 당 서기장.<사진 왼쪽부터>

 스탈린은 이미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1천만 명의 소련군인들이 동유럽에 배치되어 있었다. 소련에게 동유럽을 떠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독일과의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인들이 다시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연합군으로서는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얄타는 연합군 지도자들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사방에 소련 첩보원들이 깔려있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처칠은 헝가리를 소련의 세력권에 두되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영국이 확보하는 방안을 놓고 스탈린과 물밑 협상 중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런 처칠을 동반자라기보다는 바람잡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처칠은 루스벨트의 그런 노골적인 태도로 인해 심기가 몹시 불편해져 있었다.

회담 초반엔 전쟁을 종결시키고 전후 세계의 평화와 정의, 자유를 위해 협력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결국 동유럽 지배권이 고스란히 소련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얄타회담의 결과로 헝가리를 위시한 동유럽과 베트남,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념적 분열과 정치적 갈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한반도의 경우 전승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거론되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훗날 한국 전쟁과 국토 분단의 씨앗이 되었다.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평소 발휘해온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중대 오판을 저질렀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내용은 루스벨트의 건강 이상설이다. 병들어 힘든 사람이 왜 그처럼 먼 곳까지 가서 실익도 없이 무기력하게 들러리를 섰을까? 처칠과 스탈린의 건강은 어땠을까? 세 명 가운데 스탈린의 인지상태가 가장 온전했음은 명백해 보인다.

건강 이상설이 사실이라면, 강대국의 병든 지도자들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셈이 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루스벨트는 역대 미국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4회 연임(1933~1945년)했으며, 미국인들에게 20세기 최고의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루즈벨트가 1921년 39세에 소아마비를 앓은 사실은 재임기간 동안 철저히 감춰졌다. 2003년 미국 텍사스 의과대학의 소아 면역학 교수인 아몬드 골드만(Armond S. Goldman)은 루스벨트의 병은 소아마비가 아니라 길랭-바레(Guillain-Barre) 증후군의 오진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루스벨트는 1939년 고혈압 진단을 받았고, 정권 후반에는 수년간 혈관성 치매 증상을 보였다. 임기 말에는 혈관성 치매로 인한 인지 이상증세가 구체적으로 발현되었다. 당시 주변에는 이런 변화를 알아차린 이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루스벨트의 인지장애가 세계대전 전후 처리에 지장을 초래하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어디서든 의문이 제기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그의 사인으로 알려진 악성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로 사망하기 두 달 전, 루스벨트는 얄타회담에서 뚜렷한 인지장애 증세를 보였다. 적극 요구하고 협상해야 했던 수많은 전략적 주요 안건들을 상정조차 아니한 채 유보하거나 순순히 소련에게 양보하고 말았던 것이다. 

건강이 점차 악화되면서 평소 능수능란했던 국정운영도 허점을 드러냈다. 그의 지도력의 핵심은 각료들을 서로 떼어놓고, 머릿속에 여러 개의 상충적 방안을 동시에 다루면서 상황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체력과 집중력이 약해지면서 인내심과 통솔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성가신 논쟁을 피하고, 유쾌하지 못한 논의는 속히 마무리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루스벨트 역시 그랬다. 

얄타회담의 부실한 결과로 종전 후 공산주의가 전세계에 확산되었고,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도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급기야 세계는 50년 냉전시대로 접어들었고, 우리나라는 이념분쟁으로 내홍을 겪다 전쟁까지 치르고 남과 북으로 나뉜 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전후 세계의 지정학적 변화가 인류의 안녕과 평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혼란과 갈등으로 치닫게 된 까닭이 루스벨트의 치매 때문이라면 필자의 견강부회일까?

2011년 1월 5일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신경과 전문의인 스티븐 로마조프(Steven Lomazow)와 신문기자 에릭 펫트만(Eric Fettmann)이 ‘루스벨트의 치명적 비밀(FDR’s Deadly Secret)’이라는 책을 공동 출간한 것이다. 놀랍게도 루스벨트의 직접사인은 흑색종(melanoma)이 뇌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담겨있었다. 물론 뇌의 조직검사도 이루어진 적이 없고, 사후 베데스다 해군병원(U.S. Naval Hospital in Bethesda, Maryland)에 보관되었던 진료기록 대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진 터였다. 

그러나 저자들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피부과 전문의들에게 루스벨트의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고 얼굴의 점이 흑색종의 진단기준에 합당하다는 소견서를 받았다. 또한 흑색종은 뇌와 복부로 잘 전이되는데, 루스벨트는 심한 복통을 자주 호소했으며 잦은 부분 발작을 보였다.

루스벨트는 강박이라 할 만큼 철두철미한 성격이어서, 연설에 사용될 용어를 선정할 때도 몹시 까다로웠고 사소한 몸짓까지도 예행연습을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얄타에서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실언을 연발했으며 즉흥적이었고 횡설수설했다. 

루스벨트의 뇌출혈은 우측 후두엽에 발생했다. 후두엽에는 시각을 관장하는 중추신경이 존재하는데, 우측 후두엽에 문제가 생기면 좌측 시야에 결손이 나타난다. 얄타회담 연설문의 원문과 녹음된 실제연설을 비교했을 때, 루스벨트는 연설문 좌측에 있는 단어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한 경향을 보였다. 그 원인은 좌측 시야의 결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에 이미 그의 뇌에는 문제가 있었을 수 있다. 고혈압성 뇌출혈은 주로 기저핵과 소뇌에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흑색종의 뇌전이 가능성은 한층 더 높아진다.

 얄타회담을 마친 지 달포 뒤인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는 조지아주 웜 스프링스(Warm Springs, Georgia)에서 “머리가 너무 아프다”는 흐릿한 말을 남기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두 시간 만에 사망했다.

윈스턴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 처칠의 생활습관에는 특히 인지측면에서 도저히 건강한 말년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질적 요소가 여럿 있었다. 평소 음주와 흡연을 즐겼으며, 만성 고혈압에다 식사습관 또한 무절제했다. 더욱이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영국의 대내외 정세가 소용돌이치면서 가중된 스트레스는 수상의 고혈압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처칠의 건강상태를 계속 숨겨오던 주치의는 1947년 초 일기에 ‘처칠이 낮에는 암페타민으로 버티고 밤에는 진정제로 잠들었다’고 밝혔다. “처칠은 더 이상 사고가 비옥하지 않고 충만하던 정신은 고갈되었다.”

1948년 초 처칠은 수 시간 동안 반신마비와 언어장애가 나타나는 등 주기적으로 경증 뇌졸중(일과성 뇌허혈 발작, transient ischemic attack, TIA) 증상을 보였다.

 그러던 중 1953년에 뇌졸중이 제대로 찾아왔다. 하지만 암페타민과 잘 준비된 연설 대본 덕에 아주 가까운 사람만 눈치챘을 뿐  신경학적 이상과 인지기능 저하가 노출되지 않았다.

처칠의 언어와 국정운영 능력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부정적인 변화의 징후를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얄타회담에 참석한 처질의 인지상태가 온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회담장에서 구체적인 증상이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2차 대전이 끝난 뒤 인지장애의 징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혈관성 치매증세가 포착되었고, 1955년까지 세 차례의 중증 뇌졸중이 발생했으며, 마침내 치매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중책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 후로 10년을 더 살았지만 뇌졸중은 계속 반복되었고, 치매도 점점 깊어져 결국 처칠은 누구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가련한 노인이 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혼란에 빠진 영국 국민들을 희망의 웅변으로 단합시킨 수상, 탁월한 통찰력과 화려한 언술로 정적마저 자신을 지지하도록 이끌어 사회정의를 세워나간 위대한 정치가, 격조 높은 필력으로 폭넓고 풍부한 삶의 경험을 ‘제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에 실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문장가 처칠도 혈관성 치매를 앓다가 1965년 1월 24일 부친의 기일에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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